낯선 설렘: 크로아티아
#1
여행의 끝자리, 자그레브에 도착했을 때, 메고 있던 배낭은 눈에 띄게 헐렁해져 있었다. 오랜 여행에서 생긴 요령 때문이다. 배낭여행에서 큰 고민 중에 하나는 다름아닌 배낭의 무게다. 오롯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인 만큼,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속옷 한 장이라도 줄이려 애쓴다. 그게 얼마나 무겁다고 그러냐며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루에도 몇 시간씩 짊어지고 걷다 보면 그 미묘한 무게까지도 덜어내고 싶어진다. 옷들은 가급적이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입고 버리려고 했던 옷으로 챙겨온다. 빨래하기가 만만치 않아서이기도 하다. 하더라도 말리는 것 또한 문제다. 젖은 빨래를 배낭에 다시 넣고 다니다 보면 금방 쉰내가 진동해서 다시 빨아야 하고, 물을 머금고 있어서 그만큼 무게가 더 나간다. 그래서, 버릴 만한 옷들로 챙겨와서 입을 만큼 입다가 망설임 없이 버린다. 아깝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버림도 철학이고 미학이다. 그로 인해, 여행이 길어질수록 줄어드는 배낭의 무게가 즐거움을 준다.
언젠가 공항에서 만났던 파란 눈의 여행자를 잊을 수가 없다. 가벼운 운동화에 반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책가방 정도의 작은 배낭이 전부였다. 음악은 듣지 않는지 헤드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하지 않는지 요즘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패드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갱지로 만든 책 하나가 전부였다. 면도기도 없었는지, 수염도 자르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고 덥수룩했지만, 지저분해 보이긴커녕 풍기는 아우라 때문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보였다.
처음엔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메고도, 작은 가방을 허리춤에 찼다고 한다. 작은 노트북을 하나 들고 다녔고, 멋진 사진을 찍어야 하니 DSLR에 렌즈도 최소 두세 개는 가지고 다녔단다. 그러다 문득, ‘이게 여행인가? 지금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여행을 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짐을 줄여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내가 메고 있는 배낭을 보고는 그 정도면 매우 가벼워 보인다며 엄지를 치켜들어줬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가졌는가가 부러움의 척도가 될 수 있겠지만, 여행자들에겐 반대로, 얼마나 덜 가지고 있는가가 부러움의 척도가 된다. 적어도 그날, 그는 내가 만난 여행자 중에 가장 부자인 사람이었다.
#2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사진기 하나 손에 들고 산책을 하듯 자그레브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아담하게 펼쳐진 벼룩시장을 만났다. 주말에만 열리는 벼룩시장이라고 하니, 운도 좋았던 셈이다.
시간과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물건들이 참 많았다. 귀중한 골동품들이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부지런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나라에선 누군가를 부를 때, 주로 “아저씨” 하고 부르는데, 여기선 “형제여Brother”라고 불렀다. 그 소리가 참 정겨웠다.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사진을 찍는 동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된다고 하는 주인이 있기도 했지만, 자신이 진열한 물건들이 더 잘 나오도록 배려해주는 주인들이 더 많았다.
갖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짐이 늘어난다는 걱정에, 결국, 모든 건 사진으로만 담아서 발길을 돌렸다.
#3
우리나라 말을 하는 크로아티아인을 만났다. 누군가가 “오빠” 하고 불렀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나를 오빠라고 불러줄 사람도 없었다. 아저씨라면 모를까. 잠시 후, 이번에 내 앞으로 살짝 고개까지 들이밀고 조심스럽게 부른다.
아담한 크로아티아 여학생이었다. 어눌하지도 않고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단다. 엄밀히 말해서 꼭 나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고 한다.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니 한류를 참 많이 좋아했다.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길에 서서 짧은 대화를 끝으로 헤어졌지만, 그 짧은 만남으로 가슴 속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뜨거운 자부심이 밀려왔다.
그동안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며 한류는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치곤 했다. 마카르스카의 구석진 클럽에서도 K-POP이 흘러나왔고, 모토분으로 수학여행을 온 발랄한 여학생들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춤까지 췄다. 나와 함께 몇 번 같이 일을 했던 우리나라 아이돌의 최신 춤이었다. 반가워서 그 아이돌과 아는 사이(Know)라고 했더니, 자신들도 안다고 했다. 그게 아니라 몇 번 같이 일했던 사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를 탓하며 친구(Friend)라는 단어를 썼더니, “아, 그러세요?”라는 의심 어린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며 싱겁다는 듯이 가버렸다. 거짓말 아닌데. 사실인데. 다음부터 여행할 땐, 우리나라 아이돌과 같이 찍었던 사진이라도 꼭 들고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