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실장님과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여러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요즘 내 심정에 대해서 말했다. 내 또래들을 보면 부럽다고, 내 자신이 초라해보인다고. 그래서 내 20대의 그 시절이 아쉽다고...
“야! 그러면 지금 니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남들보다 두 배로 더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야지.”
“······마음이 그렇다고요. 생각은 분명 남들과 다른 힘든 시절을 보낸 걸 알지만 마음은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요...”
나도 알고 있다. 내 20대 시절이 쓸모 없거나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라는 걸.
나의 20대 시절은 이랬다
19살에 홀어머니를 떠나보내고 근 1년을 눈물과 멍 때리기로 보냈다. 눈물은 툭 하면 떨어지는 바람에 멈출 수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는 엄마와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과 지금의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시간들을 버텨내려면 멍을 때리며 생각을 안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고선 할머니의 등 떠밀기 식으로 대학과 교회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엔 어떻게 그렇게 매일 빠지지 않고 등교하고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교나 교회에 가면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과 인사하고 얘기하고 무언가를 그들과 같이 한다는게 너무나 힘들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마음껏 슬퍼하고 싶은데...그럴 수 없으니까.
그들앞에서는 난 항상 웃고 장난끼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용하면 이상한 애 취급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 단체생활이라는 학교와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어두운 표정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항상 울었다. ‘죽고 싶다.’라고 되뇌이면서.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군대에 갔다. 모두들 나에게 탈영하지 말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육군말고 공익으로 뺄 수 있으면 빼라고 했다. 나에게 하는 모든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냥 하는 말인거 다 아니까. 딱 그 정도의 관심만 가지고 하는 말이니까. 군대 또한 내가 가고 싶어서 혹은 ‘여기에 잘 적응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라는 마음도 없이 들어간 거라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인간 관계에서. 삶의 의욕도 즐거움도 없으니 사람들이 나와 별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했다. 나도 그게 더 편했다. 얼른 전역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1년 6개월을 버텼다.
군대를 전역하고서는 공장생활을 1년도 못 버티고 몇 개월만 하는 일하고 그만두는 짓거리를 몇 번이나 했다. 그래서 백수생활에는 늘 자괴감이 밤마다 찾아왔고 하루하루 자존감은 내려갔다. 일을 안 할땐 할머니는 한심한 눈으로 항상 쳐다보시며 잔소리로 나를 괴롭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속으로 많이 미웠다.
‘죽고 싶은데, 억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에게 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있는 방을 지나갈 때 할머니가 엄마를 그리워하시고 미안해하시면서 우시는 소리를 몇 번 들었기 때문에. 부모를 잃었을 때랑 또 자식을 잃었을 때랑 다르다면서 했던 말을 우연히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마음을 헤아리진 못해도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드시겠다’ 라는 걸.
그렇게 지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차곡 차곡 쌓여 있던 감정의 누적들이 나를 목조르기 시작했다. 좋아했던 사람과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버리질 않나, 공장 사람들은 자기 일 좀 한다고 자기보다 밑에 사람들에게 자기의 더러운 감정들을 함부로 내던졌다. 그 당시에는 내가 너무 나약해서 그런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못 버티면 다른 데서도 못 버틸거라고. 그러나 억지로 버텨서였을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더니 머리가 어지러워 서 있기가 힘들었다. 조기 퇴근하고 다음 날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큰 병은 아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나타난 증세라고 좀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했다. 나는 그 후로 바로 공장을 그만두었다.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면 또 울었다. 죽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콱!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덜 슬플게 죽을 수 있을까? 또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내가 죽어서 후회하고 죄책감에 빠져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죽는 생각만 하다보니 예전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는 버키시스트를 짰던 게 생각이 났다. 세계 여행을 가고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하고 재밌는 하루를 매일 살아보는 것들 말이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위해 그렇게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인생과 시간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죽을 용기가 생겼다면 그동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걸 도전이나 해 보자.
그 때가 28살이었고 29살부터 식당에서 일하다가 지금의 경비원 자리까지 왔다
이 거지같았던 20대 시절이 나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보자면 일단 내 삶의 ‘억지’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어서라는 명확한 이유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버티게 한다. 그 다음으로는 억지로 밝은 척 하는 가면을 벗었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가면은 벗지 않았지만 굳이 안 써도 될 가면까지는 쓰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날 좋아하는 게 불가능하고, 모두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기연민’이라는 단어도 20대의 삶을 지내오면서 알게 되었다. 내 삶은 ‘자기연민’으로 가득찬 삶이었다. 처음에는 저 단어를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런 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그저 훈계질만 해댔으니까. 아무도 공감과 위로를 해주지 않았으니까! 잠깐은 그런 생각이 들 순 있어도 이 시간이 길어지면 나에게 ‘독’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환경이 중요하다. 할머니로부터 떨어지자마자 정신이 건강해졌다. 늘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을 갖고 계셨던 할머니의 영향이 나에게는 어마어마 했다. 게다가 늘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고 삿대질, 저울질을 하셨다. 듣다 듣다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집 할머니들을 얘기하면서 똑같이 비교를 했더니 할머니께서 큰 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렇게 불만이면은 나가! 여긴 내 집이니까.”
바로는 못 나갔지만 직장을 구하자마자 집을 나왔다. 나오고 나서 한 번도 그립거나 후회되지 않았다. 너무나 좋았다. 할머니집은 여름에는 에어컨을 거의 틀지 않고, 겨울에는 벽에서 웃풍이 불었기 때문에 지금 혼자 사는 집이 더더욱 좋았다. 사람은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내가 지금 이런 것들을 왜 적고 있는 걸까? 20대 시절이 결코 헛되이 보낸 게 아니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나도 내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실장님이 나를 쳐다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20대에 힘들었던 시절을 보냈으니 지금 30대를 남들 20대 때처럼 보내는 거야...”
이 말이 괜시리 위안이 되주었다. 그렇다면 보통의 또래가 겪는 일의 순서가 나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구나 하고.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만의 힘듦과 슬픔이 있다고, 사연이 있다고, 다만 그게 당장 눈앞에 안 보이고 안 느껴져서 그런거라고. 또는 인간은 멀리서 버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는 말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쉽지 않기에 힘들지만 그들을 부러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나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자. 20대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아프고 약하고 상처가 여물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나 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문제가 생기면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 문제에 답들을 찾는데 실마리가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