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들의 죽음이 뉴스로 잇달아 나오는 요즘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를 멈추게 하고 그날들을 회상하게 한다. ‘엄마의 죽음’과 시도는 못했지만 항상 꿈꿔왔던 ‘극단적 선택’이 바로 그날들이다. 그날, 내 삶은 파괴되었고 산산조각이 되었다. 내 삶의 생기와 설렘은 말라비틀어졌고 그로 인해 나는 점점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숨이 막혔다.
그들의 죽음이 만약 본인의 선택이었다면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라고 본다.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같은 날이, 답답하다 못해 막혀오는 가슴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한다.
나의 경우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죄다 ‘맞는 말’은 해도 정작 나에게 ‘필요한 말’은 해주지 않았다. ‘너를 고생해서 키운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 ‘지금 안 힘든 사람이 어딨냐?,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나이에 지금 뭘 하고 있냐고 혀를 찬다.’
단 한 명만이라도 그때 나에게 ‘괜찮다.’, ‘많이 힘들지? 슬플 때 맘껏 슬퍼하고 울고 싶을 때 맘껏 울어!’라고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더 빨리 어둠의 동굴 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해도 내가 힘들 때 말없이 들어주는 사람, 필요한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인간관계를 많이 넓히며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내 짧은 인생 경험을 반추하고 권하자면 정말 마음이 맞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찾고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을 해 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즐겁고 기쁜 날에는 누구나 함께 해줄 수 있지만 슬프고 힘들 때는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만이 함께 나눌 수 있다. 왜 슬픈지, 얼마큼 슬픈지를 알아주는 것만으로 정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게 가능했지만) 나의 이 힘듦을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엔 ‘자기 연민’으로 빠져 한참을 허우적 댔다.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몰랐으며 더 나아가 ‘자기 연민’이란 단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나중에야 그게 나를 좀 먹는 행위란 걸 알았다. 물론 자기 자신을 위로해 줄 수는 있다. 하나 위로와 연민을 구별해야 한다.
만약 주위에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아주셨면 한다. 그들은 크고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가슴에 뭔지 모를 응어리, 답답함을 풀 수 있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타당성이 있는 ‘맞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한다면 작은 돌이라도 맞으면 죽는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거나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맞는 말’ 보다는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힘들어 보이네. 무슨 일 있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이 두 문장의 마법이 그들의 억눌린 슬픔과 힘듦을 풀어주는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