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포대 그것은 가난의 꼬리표

by 하짜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 시절에 그렇게 아이들을 웃기는 데 열중했던 이유가 일종의 회피외면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의 가난과 나의 가정환경이 아이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 회피의 방법으로 ‘웃음’을 택한 것이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을 보았을 때의 그 초라함과 무력감과 찌질함의 충격으로 더는 나 자신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웃겨야 한다는 것과 있지도 않고 전혀 가능성도 없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쩌면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내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일 수도 있겠다)

2학년 생활은 정말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게 한국 대중문화의 절정기와 맞물려 모든 것들을 흡수하다 못해 죄다 빨아들이는 우리였기에 이야깃거리는 물론이거니와 멋지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흉내 내고 따라 하며 한껏 멋에 심취하기도 하고, 유행어와 개그를 따라 해 교실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한 마디로 물 만난 물고기들이 심심해 숨 막혀 죽을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나는 적어도 내가 속한 중학교 2학년 반 교실에서 만큼은 김밥 속에 있는 단무지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관심이 으로 바뀔 때가 있었다.


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방송으로 호명된 아이들은 ‘쌀 포대’를 짊어지고 하교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쌀 포대를 가지고 가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바뀌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에게 일어날 일도 달랐다.

아이들에게 큰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나이기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가난’과 ‘가정환경’에 대 추궁을 받아야만 했고 중2 담임 선생님은 중1 담임 선생님과 달리 조용한 배려를 잊은 채 쌀 포대를 받은 아이들을 방치하고 노출되게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이전까지 갖고 있던 담임 선생님의 호감과 좋은 이미지는 박살나고 오로지 악에 받쳐 남은 2학년 생활을 보냈다.


선생님은 나의 이런 감정의 태도를 금세 느끼고 뭐라고 하셨지만 내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무서운 남자 선생님이 아니라 가냘픈 여자 선생님이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이런 일정한 패턴은 1학년 때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쭈욱 이어졌다.

내 이름표 뒷면에는 ‘저는 편모가정입니다.’ ‘우리 집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지우고, 떼려 해도 소용없었다. 하면 할수록 나만 비참해질 뿐이었다.

또 다른 난관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두려움, 불안, 원망을 가득 안고 3학년으로 올라갔다.



https://youtu.be/poLxD_zx1nY?si=Jp8__Ik_7D996zj3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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