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를 따로 치르는 녀석들이 있다. 특수교육대상학생으로 분류되는 학생들 중 다른 아이들이 시험 볼 때 방해할 수도 있는 녀석들이다. 일테면 틱이 있다거나 답안지에 마킹하는 걸 도와줘야 하는 녀석들. 대학시절부터 자원봉사니 장애인권 활동이니 하며 소위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고 무엇보다 특수교육을 전공했으므로, 장애인에 대해 늘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학교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은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다 생각한 나를 들었다 놓곤 했다.
아침에 출근해 아이들 시험과목을 다시 확인하고 답안지, 수정테이프, 여분의 컴퓨터용 사인펜을 챙기는데 메시지가 왔다. 고등학생 자살률이 작년대비 120%가 증가했으므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그간 근무했던 학교마다 삶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 심지어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이 아파트, 한강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은 충격과 슬픔, 깊은 안타까움을 넘어 근원적인 물음을 낳는다. 왜 아이들이 자살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자살하지 않을까. 대체 삶에 중요한 게 뭘까... 와 같은.
메시지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 문을 열었다. 세 녀석이 각자 할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게임에 정신 팔린 녀석들과 달리 빨간 운동복 상의를 입고 있는 환(가명)이는 족보닷컴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이 아이는 중학교 때까지 특수교육대상자로 분류되지 않았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아이의 부모가 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선정받는 걸 미룬 케이스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와 고유한 삶의 형태가 있게 마련이므로 그에 관해 부정적 의견을 내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어머니께 받은 문제지를 열심히 보다 막상 수학 시험 답안지는 3번 내지 1번으로 죽 마킹하는 환이를 보면 한 번뿐인 삶.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 모르는 삶인데 좀 더 즐거운 일에 집중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수학을 포기한 학생이 부지기수라는데, 그건 그 아이들이 게으른 탓일까, 수학교육과정, 교육환경이 부적절한 탓일까.
환이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직 공부에 흥미 없는 딸에게 이런저런 문제집을 사 주고, 그 문제집을 고스란히 재활용통에 넣는 경험을 반복하던 내 모습이 겹친다. 그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공부도 때가 있고 뭣보다 타인이 시키는 공부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을 터인데, 그 재능을 발휘해 살 수 있는 터전을 사회가 마련한다면 어린 나이에 삶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줄지 않을까. 대한민국이란 곳이 성적으로 학벌로 사람을 줄 세우고 그 서열을 존재가치의 서열로 환원시키다 보니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 서열을 내재화하고 심지어 생을 포기하기도 하는 거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몇 년 전 수능감독을 하는 데 눈송이가 날렸다. 근위축증이 있는 학생, 자폐가 있는 학생, 지적장애가 있는 학생이 띄엄띄엄 앉아 시험을 치르는 교실은 휑했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문제 푸느라 골몰하고 있는 학생들이 대견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가운데, 나와 같이 이따금 눈송이를 보며 웃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옆으로 슬며시 가보니 아이의 답안지가 깨끗했다. 문제를 열심히 풀던 학생인데, 답안지에 마킹하는 걸 잊었나 싶어 내 마음이 다 초조해졌다. 시험 종료 십분 전, 구분 전, 팔 분 전. 갑자기 아이가 컴퓨터용 사인펜을 들고 답안지를 2번으로 채웠다. 어이없고 허무했지만 웃음이 났다. 날리는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과 마음을 지녔건만 수능문제는 무리였던 것이다.
지체장애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발달장애 아이들이 답안지에 마킹하는 방법은 다채롭다. 대개 한 번호로 답안지를 채우기 일쑤. 조금 정성을 들이는 녀석은 지그재그 형태로 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규칙적인 수열 일테면 1 1 1 1 1 2 2 2 2 2 식으로 답안지를 마킹하기도 한다. 어떤 녀석은 시험문제는 읽지도 않고 소위 랜덤으로 답을 골라 동그라미를 친 후 답안지에 자기가 고른 답의 번호를 정성스레 옮기기도 한다. 고개를 숙이고 주어진 일을 나름의 방식으로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답안지를 각양각색으로 채우고 있는 저 아이들의 삶과 곧 수능을 치르고 플래카드에 이름이 나열될 아이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가. 우열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던 날 내 정신 줄을 잡아주던 아이들은 늘 ‘주변의 아이들’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존재의 풍성함과 다양성이 간과되는 아이들. 돌이켜보면 가르치는 자인 난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인간 존재의 다양성, 풍부함... 그리고 사랑을 배웠다. 무더웠던 여름이 드디어 가고 맞은 청량한 가을날, 길거리 나무들이 서로의 배경이 되어 잎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다양한 빛깔의 나무들이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며 공존하는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서로 다른 크기와 밝기로 아름다운 밤하늘을 채운별을 보며 서열을 따지는 이가 없듯, 저마다의 삶을 그저 존중한다면 삶의 기로에서 힘들 때 삶을 포기하기보단 털고 일어나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누가 규정했을지 모를 쓰임보단 존재 자체를 보는 눈. 이 가을엔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