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증적 편향에 대한 소고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비욘드 더 스트림> 전시를 봤다. 모두가 아는 뭉크의 <절규>는 20세기의 상징과도같은 작품이다. 이 그림엔 홍수와도 같은 불길이 검푸르게 피어오르고 있고, 친구들은 앞에 걸어가고, 사진 속의 본인은 절망과 공포에 떨며 절규한다. 문명인으로서의 두려움이나 패닉, 공포를 그림에 그대로 넣어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공포, 불안, 고립, 외로움 인간의강한 감정에 집중한 뭉크는 본인이 경험한 처절히 불행하고 외로웠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비극적인 유년기를 맞으며 작품에 드러내고자 했던 죽음에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그가 오랫동안 그림 그려준 자체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뭉크의 전시에서 나란히 줄지어 관람하는 이 사람들은 작품마다 각자의 의식을 넣을 것이다. 각자의 생각과 각자의 편향대로 그 작품을 해석할 것이다. 뭉크가 살아 돌아와 그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 공간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명 모두 생각이 다른 것이다.
예술의 영역은 이처럼 정해진 답이 없어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눌 때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더 풍부해진다. 오히려 다수의 목소리가 개인의 편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근데 예술을 제외한 모든 영역, 특히 현대사회에서 각자의 의견과 생각은 다양성, 융화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아집에 취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바꾸지 않을 명백한 합리화를 위해서 본인이 직접 겪은 경험과 관련된 정보만 취하려 하고 이 외의 것들은 철저히 배척해 버린다. 본인이 배척하지도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필터링한 정보를 접하려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군가 자동차를 사고 싶어 자동차를 검색하면 유튜브는 그걸 어떻게 알고 차만 보여준다. 본인이 외제차가 좋다고 생각하면 국산차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게 되고, 유튜브는 국산차를 필터링해 외제차가 좋은 이유를 언급한 정보들만 내 눈에 보여준다. 보통 제목은 ’국산차를 사면 안 되는 이유‘, ’올해 외제차를 꼭 사야만 하는 이유’ 정도 되겠다. 이걸 우린 ‘자기 확증적 편향’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체리피킹. 본인이 원하는 체리만 골라 집겠다는 것이다. 본인이 보는 대로만 생각하고, 타인이 보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 가깝다. 나는 요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이 자기 확증적 편향이 심어져 있다고 본다. 매우 위험하다고 받아들인다. 대면뿐만 아니라 온라인은 아예 공통된 주제에 편을 억지로 갈라서 대립하며 각자의 확증적 편향을 무기로 삼아 서로 싸워댄다. 누가 옳든 간에, 서로의 입장을 포용해 주고 들어주는 사람마저 이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판국이다.
자, 그렇다면 예술은 이런 ‘자기 확증적 편향’에서 아예완전히 벗어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사실 왜곡'을 할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아까 말했던 뭉크를 볼 때 작품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얘기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인이 그냥 느낀 것이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 기쁜 작품에 내가 슬펐으면 그냥 그건 슬픈 것이고, 심오한 뜻을 가진 작품에 내가 웃음이 났다면 그냥 본인에겐 재밌는 작품인 것이다. 근데 예를 들어, 상상력에 집중하고 주관적인 감정과 심리적인 복합성이 작품에 녹아있는 표현주의 화가 뭉크에게 현실주의작가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근데 그걸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주장하고 ‘사실을 왜곡’ 할 때에는 이는 문제가될 수 있다. 그런 식이다. 또 다른 예시를 보자.
주말만 되면 내 친구들은 소개팅을 나간다. 카페에서 무슨 메뉴를 시켜야 할지, 다음 동선은 어떻게 되는지, 본인만의 상황별 매뉴얼을 아예 갖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내 친구 중에는 외모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친구가 있다. 그는 외모가 준수하면 겸손하고, 자상하고, 똑똑하고 그 외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에 해당하는 조건들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들만 선택적으로 수집하고, 설령 외모가 출중한 상대가 본인에게 (객관적으로) 나쁜 행동을 보여도 그 자체를 부정한다. 외모가 괜찮으면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마치 스스로 주문을 외우듯. 그야말로 자기 확증적 편향에 빠져 사는 친구다. 그는 나중에 작고 편협한 정보만 선택적 수집한 대가를 어떻게든 치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엔 그가 아는 1% 외에 모르는 99% 존재하는 법이니.
정치는 어떤가. 부모님은 정치성향이 한쪽에 극도로 치우쳐있다. 몇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지지하지 않는 반대 정권과 관련된 뉴스나 TV채널은 아예 보지도 않는다. 정보 수집 자체에 매우 극적이다. 그리고는 색깔이 분명한 매체를 선택적으로 수집해, 본인의 가치관과 의식을 점점 굳게 다져간다. 마치 테트리스를 쌓듯.
정치, 종교뿐 아니라 이처럼 우리 매사에 있는 모든 것에 현대인은 자기 확증적 편향에 중독되어 산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발표한 무주택자 제외 주택담보대출을 제한하는 정책에 모두가 관심이 뜨겁다. 은행에는 이미 가계약을 한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면서 줄을 서 있고, 은행상담원은 하루에 전화를 몇 백통씩 받는다고 한다. 자, 집을 사려는 사람과 집을 팔려는 사람(사지 않는 사람). 당연 이 정책으로 바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대중은 상반적 의견을 내놓을 것이다. <집값이 오르느냐 vs 내리느냐>. 다주택자들은 지금 집안 사면 부자 되는 건 포기하라고 자극적인 썸네일을 활용해 구독자를 선동한다. 반면에 허세 부리다 가랑이 찢어진다고 분수에 맞게 살자며 지금은 시기상조라하는 일명 ‘폭락론자’들은 이런 말을 아예 듣지도 않는다. 상승론자들은 계속 더 부동산이 오르는 지표와 데이터, 증거들을 들고 오고, 반대는 부동산이 떨어지는 사례를 끌어모은다. 이런 식이다. 사람은 이처럼 모든 매사에 진실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어버린다. 왜냐? 그래야 밤에 잠이 잘 오거든.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거든. 우리는 이 '확증적 편향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삶은 예술 같지 않다. 내가 표현하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그뿐인 게 절대 아니다. 삶은 아주 미세하게 촘촘히 모든 것에 연결돼 있고, 우리 모두는 서로의 의사결정으로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확증적 편향에 의한 결정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도 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우주에 살아간다는 게 좋은 면도 있지만 따라오는 결과가 이렇게나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을 나는 알고 있다. 늘 ‘나는 틀릴 수 있다’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깔고 시작해야 한다. 본인만 절대 잘난 게 아니고 본인은 늘 틀릴 수 있다는 전제. 그게 내 세상 이 외의 것들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본인의 사고의 폭을 더 넓히는 길이다. 왜 내 생각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내 정보에 대한 근거만 긁어모으고 다른 건 의식적으로 배척하는가. 이미 내가 A를 생각하면 이미 남들도 A 아니, B까지 생각하고 있다. 착각과 망상에서 이제 벗어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