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스턴트 패밀리> 리뷰
일반인들에겐 생소할 수밖에 없는 ‘입양’에 대한 과정과 입양한 세 아이와 감동적인 서사를 풀어가는 가족이야기. 단지 내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입양에서 인생의 전부가 되어가는 가족의 진정한 정의를 되새길 수 있는 논픽션 영화다. 위탁부모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세 아이를 보면서 진심은 서로에게 어떻게 해석되며, 진심이란 게 결국엔 언젠가 통하며 바른 답을 찾아간다는 희망을 준다. 매 시퀀스마다 나타나는 마찰, 그 속에서 위탁부모와 보호아동이라는 각자가 가진 사회적 약자라는 꼬리표를 하나의 가족으로 극복하는 말로 표현못할 울림을 준다.
영화는 소수에게만 선택되는 ‘입양’을 입양센터에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노출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며, 동질감을 만들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어, 가족이라는 형태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음을 환기한다. 비혼주의자, 출산율 하락, 다문화가정 급증과 같이 현대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상에 꼭 필요했던 접근이 아닐까 싶다. 하나의 중요한 현상을 영화를 통해 알린다 해서 결코 무겁지도 않고, 각 인물이 주는 유머러스함과 개성으로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위탁아동들의 현실은 실로 참담하다. 부모는 연락이 되지 않고, 마약과 범죄를 일삼기도 하며 교도소에 있거나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대부분이다. 어리면 어릴수록 가치관 형성이 컨트롤 가능하고, 교육 부분에서 수월하기에 입양을 원하는 부모에게 선택될 확률이 높으나, 선택 받지 못한 채 이미 10대로 큰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주인공 부부는 본의 아니게 10대 소녀 리지를 포함한 삼 남매를 입양하게 된다.
인스턴트 패밀리의 'Instant'는 우리 삶에 밀접하다. 인스턴트식품, 인스턴트커피처럼 시간을 아까워하는 현대인에게 즉각적인 결과를 제공하는 속 시원한 단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 단어가 가족과는 어떤 상관이 있길래 왜 ‘인스턴트 패밀리’이며, 이 주인공 부부는 왜주택 리모델링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참 흥미롭다. 감독이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 결국은 가족이라는 한 매개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 무적 같은 단어도 그들의 직업처럼 리모델링을 통해 점차 쌓아 올리는 과정이라는 함축적인메시지를 얘기하고자 함이 아닐까?
어릴 적 아픔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학폭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십 년,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어릴 때일수록 우리 뇌는 스펀치처럼 빨아들이기 때문에 어릴적 아픔은 성인이 됐을 때보다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 아픔을 부모는 영화 러닝타임 내내 진심을 보이며 ‘가족’ 즉, 새로운 집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고유명사를 영화에서 완성해 간다.
현대사회에 가족이라는 의미자체는 사실상 퇴색된지 오래다. 돈에 미쳐 가족을 죽여 보험금을 탄 일행이 뉴스에 버젓이 나오고, 취업이나 각자가 처한 밥벌이로 대개 떨어져 사는 경우가 흔하다. 1인가구 비율은 35%를 넘었으며, 그 수는 1,000만에 육박한다. 우리나라 국민중 다섯명 중 한명이란 소리다. ‘독립’은 하나의경우의 수 혹은 키워드가 아니라, 청년들의 ‘필수’ 혹은‘꿈‘이 되어버린 시대다. 관계에서 상처받고, 사회생활의 물고 뜯기는 경쟁 속에서 결국 내 편은 무엇이고, 내삶을 지탱하는 코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추석명절 가장 값진 영화가 아닐까 한다. 넷플릭스를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발견한 스스로가 참 운이 좋다고 여길 정도.
우리는 각자의 환경 속에서 고유한 생각을 가지며 살아간다. 그중 나이가 많다고 모든 경우의 수를 무시한 채 본인이 재단한 정답을 강요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 나이테가 달라진다 해서 그 머릿속에 가진 관념이나 사고가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근데 그 당사자들은 착각에 사로잡혀 타인을 관철시키려 든다.
‘꼰대’라는 단어도 그렇게 탄생했다.
가벼운 사명감과, 이 세상에 한 줌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자기 위안으로 시작한 주인공 부부의 입양은 어른의 입장에서 느낀 철저한 ‘갑’의 위치에서의 망상이었고, 정작 아이들의 상처와 그들의 경험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보호소 담당자 외 영화 초반, 그 누구도 품어주지 못했다. 결국, 서로의 세상을 이해하는 노력과 그 충분한 시간이 부여될 때만이 하나의 완전한 가족이라는것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결국 러닝타임 두 시간의 압축된 서로의 노력이 영화를 해피앤딩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하물며 가족도 이런데 어떻게 사회생활하는 모든 현대인이 이런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을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혼자 살지 않고, 서로 함께 살아가면서 그 단점을 서로 보완해 간다. 하나의 공동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개개인이 기여하면서성취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조직에 융화되는 인원도 있으나 늘 문제는 와해시키는 이들에게서 발생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뭐냐. 앞서 말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니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전에 소시오패스적인 망상. ‘내가 100%를 했다면(주었다면), 당연히 너도 100%를 주어야 한다’라는 이기적 논리가 선행돼서 그렇다.
영화에서 위탁부모가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 잘 챙겨주는 노력만 한다 해서 아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듯, 우리 사회도 이런 일방향적인 사고 자체를 애초에 버려야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아래 결혼준비에서 양가 경제적 지원을 동일하게 바라고, 그게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파혼하고. 내 친구도 이런 이유로 파혼 여럿 했다. 소개팅을 나가기도 전에 조금이라도 피해볼까 노심초사하며 서로 스펙을 재고. 자식의 취업에 월 몇십 만원씩 생활비를 요구하는 부모에, 부부간 월급의 공평함을 논하고, 집안일의 공평함을 바라고. 더 말하고 싶은데 끝이 없다. ‘입양’이라는 행동을 취하는 존경스러운 이들 뒤에서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사회에 ‘나’가 아닌 타인의 세계를 최소한 받아들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연인이나, 부모와 자식 간 도리나, 부부간의 ‘가족’이라는 매개체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공동체를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이게 서로 간의 공평함보다, 개인의 손해에 따른 피해에 집중한 현대판 소시오패스를 풍자한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가 있다. 독일어로 ‘타인의 불행에 대한 기쁨’이라는 뜻이다. 현대사회는 공동체가이제 사라졌다. 개인주의의 단점만 남은 국가다. 타인의 불행이 곧 위안이 되는 시대다. 어제 모 유튜버의 한논란에 한국판 냄비근성이 달려들어 또다시 몇만 개의악성댓글이 양산됐다. 이때다 싶어 달려들어 한 사람 매장시키는 게 본인에겐 시기와 질투를 쇄신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 해서 결국 무엇이 달라지는가 깊이 고심해야 할 때다.
감독이 세 아이를 입양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현대인에게 공동체가 지탱하는 힘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