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리뷰
집에서 잠옷으로 입는 반팔이 있다. 보통 잠옷으로 입는 옷은 밖에서 입기에는 좀 부족하고, 자기 전 입기에 딱 좋은 면으로 된 편한 소재다. 극단적으로 이 편한 옷을 6년 동안 입었다 해보자. 보통 군대에서 입는 깔깔이도 전역한 지 13년이 지난 현재도 잘 입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전제다. 근데 몇 년 뒤 어느 날, 어느 순간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려고 하는데 옷이 없다. 순간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대안으로 다른 옷을 입고 잠에 든다. 부모님께 물어보니, 오전에 사촌동생이 왔다가 본인 옷을 다시 찾아갔단다. 맞다. 이건 사실 몇 년 전 사촌동생이 놔두고 간 비싼 브랜드의 옷이었다. 직접 겪은 실제 경험담이다.
자, 근데 이게 옷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면 어떨까. 내 자식인 줄 착각하고 모든 걸 퍼부으면서 온갖 노력과 정성으로 키워낸 내 아이가 결국엔 내 친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6년 뒤에나 발견하고, 원래 부모가 내 자식인 줄 알았던 아이를 데려가고, 진짜 아이를 오늘부터 키우라고 새로운 아이를 준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줄거리다.
인간은 누구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혹은 본인이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인간의 눈에 비치는 모든 건 개개인의 가치관, 사상,이념을 모두 아울러 시각적으로 눈에 투영시킨 결과물일 뿐이다. 즉,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아래 그림을 보자.
물컵에 물이 반정도가 남아있다. 어느 누군가는 이 물을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반이나 남았다고 안도한다. 두 사람의 입장 모두 객관적인 사실이나, 각자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고방식이 정반대로 나뉘는 거다. 혹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목이 아주 마른 누군가는 컵에 물이 이것밖에 없냐며 투덜댈 수 있다. 목이 안마르면 그 반대.
건축회사에 다니는 료타는 집에 여유가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나 비전통적이며, 자식에게는 엄하고 무관심한 아빠다. 한마디로 완벽주의자다. 특히 본인이 하고 있는 업에서의 완벽을 꿈꾸며 모든 삶이 그 한 곳에 몰입돼 있다. 호텔을 방불케 하는 그런 근사한 곳에 산다. 이런 그는 당연히 가족에 대해 이성적으로 대입이 어려울 수밖에. 늘 시간에 쫓겨 가족을 등한시하나 회사에서의 출세와 부가 결국 내 가족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반면 그의 아들 케이타는 이런 부모를 보고 사랑받지 못함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날 친자식 류세이와 본인이 6년간 키운 케이타가 바뀐 것을 알게 되고,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까지 넘겨져 끝내 류세이로 자녀를 바꾸게 된다.
병원에서 일부러 아이를 바꾼 이는 용서하지만 돈이면다 해결될 거라 믿고 류세이와 케이타 모두를 가난한 아빠 유다이에게서 데리고 오려한다. 큰 실수를 한다.
이에 반해 케이타의 아빠 전파사 유다이는 가진 것 없어도 가정적이고,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 아버지라는 시간도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료타에게 일깨워주는 사고는 두 아이 모두가 오히려 료타를 피하고 그의 집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
료타는 피가 섞인 친자 류세이를 키우며 우연히 발견한 케이타의 카네이션, 그리고 본인을 찍은 카메라의 사진을 보면서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면서 영화는 시청자에게 묵묵한 여운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의 선택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그 선택의 핵심에 있는 료타라는 부모 자체를 거시적으로 관찰한다. 그 메시지는 바로 결국 부모도 아이와 같이 똑같이 자란다는 것.
본인의 사고가 아이에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구나, 그토록 모두가 치켜세우던 그의 목표가 한순간에 좌천당하며 이렇게 무너질지라도, 가족은 이렇게내 옆에서 나를 보듬어주는구나. 돈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보다 인간적이고 전통적인 매개체 '가족'의 재정의를 이 영화는 좀 더 시청자의 입장에서 긴 호흡으로 환기시킨다.
결국 아버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부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실 돌아가신 10년이 지난 지금 희미하다. 희미함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 자체가 나를 슬프게 한다. 경상도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함과 보이지 않으려 했던 따스함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눈물을 흘리셨으니까.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사별이었기에 료타같은 완벽주의자 아버지나, 유다이 같은 인간적인 아버지, 즉 아버지의 성향에 대해 논하기보다 아버지라는 그 근원적 부재가 나를 오랫동안 지겹도록 그립게 했다.
부모의 마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직접 겪기 전에도 부모라는 이 영화만의 특별한 메시지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부모는 낳고 나서 부모가 아니라, 부모 또한 학습에 의해 훈련되는 것임을. 부모가 아이에게 훈육함과 동시에 사실 부모 자체도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중이라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가 덜컹 아이가 생겨, 시간을 투자해서 양육하고, 교육하고,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기르는 건데 그 과정에서 부모도 당연히 성장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영화 속 료타도 비록 친자식 류세이를 키우고 있지만 이 영화의 끝은 결국 카이타까지 신경 쓰며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냥 부모는 어쨌거나 다 부모인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모두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의 노력이 수반되는 거룩한 행위인 것이다.
료타가 우연히 발견한 카네이션과, 카이타가 찍은 카메라 속 담긴 본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평생을 가족 외부를 겉돌았던 본인 인생을 부정하고 후회함과 동시에 본인이 가족에 대한 어떤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의 성장의 과정도 내포돼 있다.
우리는 늘 성장에 목매어 있다. 그리고 후퇴보다 늘 성장을 강조한다. 한순간의 쉼도 허용하지 않는 게 현대사회다. 앞만 보고, 높은 곳만 보고 달리는 것이 곧 성장이고 그것이 옳은 인생으로 간주한다. 근데 사람은 원래 불완전하다. 늘 그 과정에서 실수가 수반된다. 부모도 어찌 안 그렇겠나.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으랴. 후퇴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는거다.
누군가에겐 료타가 완벽한 부모일 테고, 누군가에게는인간적인 유다이가 부모로서 완벽할 텐데 이토록 주관적 관점 자체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걸 반증한다.
이 불완전한 인간 즉, 부모가 가족은 혈연일까, 함께 한시간일까를 고민하지 않고 모든 걸 사랑으로 품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존재임을 결국 이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사회적 약자 혹은 가족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려는 섬세한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특히 다소 날카로울 수 있고, 격앙될 수 있는 주제와 줄거리 속에서도 폭력 하나 없이 조용하고 불편하지 않은 시퀀스는 이 영화를 더 매력적이게 한다. 등장인물의 다양한 감정선을 이토록평온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올 연말, 가족과 부모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가족과 함께한다는 그 자체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충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