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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Dec 13. 2024

걱정 말아요 그대

걱정을 달고 사는 이들에게

걱정이 늘 앞서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한 선한 목적도 있겠지만 대개 이 걱정들은 본래의 그 의도에서 한참 벗어난다. 오히려 안 하는 것보다 못한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나는 지금 또 하나의 걱정을 하고 있다. 근데 이 걱정도아직 일어난 사건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내게 일어난다고 100%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어난다 해도 굳이 별다른 해결책도 없다. 그런데도 걱정을 왜 하냐고?걱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습관처럼 ‘그냥’ 하는 것이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니코틴이 체내에 들어오지 않아서 즉, 담배에 중독돼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습관 때문이다. 시간이 남았을 때 담배를 손에 쥐고 불을 붙이는 그 찰나의 순간까지 그 손에 쥐는 짧은 습관으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손이 심심하거든.

걱정도 이와 같다. 본인이 처한 상황이 급변하거나, 주위의 사람이 바뀌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새해가 밝았거나, 중요한 이벤트를 앞두고 있거나 할 때에 걱정은 습관처럼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세계 최고 부자 일론머스크도, 세계의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트럼프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노부부도, 태어난 지 몇 백일 된 아기도, 행복하게 세계여행을 하는 트레블러도 걱정이 있다. 걱정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으며 누구나 각자만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하루 세끼를 안 먹으면 배가 고픈 것처럼 걱정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어패가 있다.

그저 ‘또 걱정이 왔구나’라며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하다.

우리 뇌구조에는 '편도체'라는 게 있다. 이 편도체는 인간의 공포와 불안, 공격성과 같은 극단적인 감정들을 처리하는 곳이다. 앞선 예시처럼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생길 예정일 경우에 자연스럽게 본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이 편도체를 통해 발현된다. 무릎을 살짝 건드리면 다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이처럼 걱정의 존재 자체는 무조건 반사에 기인하기에 본인이걱정을 평소에 많이 한다고 해서 이상하거나 문제가 있는 게 절대 아니란 거다. 오히려 적당한 걱정은 일의 효율을 올리고 성과를 부르는 ‘필요악’의 역할을 분명 수행할 때가 있다.

하지만 현대인은 스스로 뇌를 속여서라도 자기 암시를통해 걱정을 줄일 필요는 있다. 걱정의 양 자체가 절대적으로 많아지면 스트레스와 피로로 다가오고, 심신의안정을 방해하거든. 무엇보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의 상실과 막연한 불안감, 본인만의 상상 속에만 매몰돼 더 큰 걸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걱정이란게 어떤 원인에 의해서 명확하게 배태된 것이 아니라 그냥 본인만의 망상 속에 갇힐 때 이 걱정의 쓸모는 철저히 사라져 버린다.

걱정을 줄이기 위한 명쾌한 해답 같은 건 없다. 다만, 걱정을 과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진실은 있다. 나는 그걸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통제의 영역이다. 매사에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은 두 가지로 나뉜다.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냐/ 아니냐.


끝. 내일의 날씨나, 불의의 교통사고, 교통체증, 자연재해, 지금과 같은 탄핵정국의 정치판, 하물며 욕을 쏘아대는 직장상사까지. 회사에서의 승진과 평가,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 자영업자의 오늘자 매출액 등 이 일상 속 모든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무슨 수를 쓰든 내 의사와 관계없이 아주 많은 원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 해서 결과가 그 최선에 정비례하게 바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란 거다. 외적변수가 크게 작용하는 온전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말 좋아하는 이성친구가 있는데 맨날 집에 바래다주고, 맛있는 걸 사주고,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면서 구애를 해도 사실 그 여자가 본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될 수 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싫어할 수도 있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도록 억지로 통제 자체를 할 수 없다. 이런 것에는 걱정의 쓸모 자체가 사라진다. 본인이 정해진만큼만 하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냥 겸허히 결과를 기다리고, 그 결과에 대해 수용하면 된다.

자, 그럼 답은 나왔다. 어떻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어제의 과실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것, 가령 중간고사를 망친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은 기말고사를 잘 본다거나, 직장인은 업무지식이 개판이라 평가를 잘 못 받았다면 본인이 맡은 분야에 조금 더 전문성을 쌓아가 본다거나, 지금 뚱뚱하다면 건강관리를 하기 위해 음식조절을 앞으로 해본다거나. 내가 바꿀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길이라 여긴다.

자, 이제 오늘부터 무언가에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딱 일분만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인가?'

통제할 수 있다면 걱정할 가치가 있으니, 생각을 좀 더 해보면서 해결책을 고심하면 된다. 통제할 수 없으면 하루빨리 그냥 버리면 된다. 너무 간단한 논리. 이 마인드라면 2025년 새해엔 더 가볍고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낼 수 있다.


다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어차피 다 된다.


어차피 다 잘 풀린다는 거다. 이게 무슨 일반화적인 얘기라고? 진짜 그렇다. 본인이 애초에 바랐던 대로 100% 잘 풀린다고는 못하나 어떻게든 다 된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겠다고 하는 동생이 있다. 형편이 어려워 아기를 낳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지인 커플이 있다. 맨날 최종면접에만 가면 탈락해 본인의 삶이 망한 것 같다며 한탄하는 동생이 있다. 최종면접만 8번, 9번째다. 중소기업에 다녀 연애를 할 여유가 없고 여자가 나를 좋아해 줄지 말지 자신감이 상실된 친구가 있다.

다 된다. 결국 다 된다. 돈 없어도 결혼해서 잘 살고, 형편이 어려워도 그 형편에 맞게 애 둘셋 잘만 키운다. 전세살이를 전전하든, 단칸방에서 살든 어떻게든 상황에 맞게 잘 키운다. 애기는 또 알아서 잘 큰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3년만 지나 봐라. 그토록 취업에 스트레스받았던 그때와 달리 어쨌든 어느 곳에서 일해 돈벌이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지 멀쩡한데 일할 데 없겠나? 곰곰이 잘 생각해 봐라. 원인은 다른 데 있을 확률이 높다. 눈이 너무 높아 고집을 피우거나, 안 되는 걸 하염없이 붙잡고 있거나. 어떻게든 다일은 한다. 추남추녀도 잘만 연애하고 다 결혼한다. 남들이랑 비교하면서 열등감만 안 가지면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 다 잘 풀린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부정적인 결말은 내 능력치의 한계를 넘어설 때만 대개 발생한다. 무슨 말이냐고? 예를 들어보자.

내가 우사인볼트보다 빨리 뛸 수 있는가?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그보다 빠르게 달려 올림픽 금메달 딸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시간이 흘러 갑자기 손흥민보다 축구를 잘할 수 있나? 차은우보다 잘생겨질 수 있나? 마찬가지. 시간이 흘러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건데 대개 우리가 고민하는 이 일상 속 문제들은 대개 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어떻게든 다 잘 풀리고 다 잘 살아진다.

그렇기에 이 글을 보는 모두가 올해가 2주 남짓 남은 이 연말만큼은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했으면 한다.


어차피 잘 될 거니까. All i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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