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왜 좁아져가는가
어제 한라산을 등산하며 친구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었다. 이 친구는 의산데 10대와 20대 때 함께 했던 지인과는 몇 명만 제외하고 연락을 다 끊었다고 한다. 이럴 때 대부분은 이 친구가 사회적으로 누구나 인정하고 선망받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니 수준에 맞는 사람들로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수준이 높든 말든 여부를 떠나 사람 자체를 많이 만나지 않는다고. 대화자체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옛 친구들을 만나도 모든 이야기의 주제나 사고 자체가 과거에 머물러있어 더 큰 사고와 생산적인 얘기가 힘들다고. 라포 형성 자체가 안된다는 거다. 그래서 연말인데도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고 한다. 이 짧은 대화에 뇌리를 스쳤던 상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가장 슬픈 건 중 하나는 친구라고 죽고 못살았던 이들과 멀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경조사가 있을 때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한 이들도 있다. 이는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친구가 잘못한 것도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우린 이 원인을 찾는 데에만 급급하고 잃기 어려워해 늘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쓴다. 회복하려 한들 서로에게 좋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집착을 내려놓고 나서야 만 겨우 보인다. 모두에게 이 경험이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뭘까. 바로 ‘공통점’이다. 현대인에게 이 공통점은 대개 네 개로 분류된다.
1. 당사자 간 공통의 상황에 처해있다.
2. 당사자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3.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4. 금전적으로 엮여있다.
이 네 가지 공통점 중 하나라도 속해있지 않다면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으로 말할 이 모든 예시의 전제는 예외도 있음을 참고하길 바란다.
먼저 당사자간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예를 들어보자.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청년에겐 큰 화두다.
미혼이라면 미혼끼리 다닌다. 미혼은 결혼생활에 큰 공감을 하지 못하고, 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F인 사람도질문해 가며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가 힘들다. 결혼을 했다면 유부남녀는 그들끼리 시간을 가질 확률이 높다. 말이 잘 통하고 친구보단 가족이 삶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자녀다. 자녀가 있다면 혼자일 때보다 인생에 포기해야 할 부분이 존재하고, 삶을 대하는 가치관 자체가 달라지므로 인생에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결혼한 무리 중에서도 또 그들만의 무리가 형성된다.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는 육아 경험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를 공감하지 못하고 영혼 없는 리액션밖에 해줄 수 없는 것이다. 본인은 진심 어린 리액션을 안 하니 불편하고, 상대는 충분한 관심을 못 받는 것 같아 불편하니 당연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자녀가 둘인 내 친구는 실제로 10년이 넘도록 알고 지낸 중고등학교 친구보다 아파트에서 같이 자녀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끼리 훨씬 더 자주 만나고 편하다고 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처럼 처한 상황에 따라 무리자체가 통째로 바뀌는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 봉착하면 무리 중 한 명은 함께 했던 지난 소중한 추억을 꺼내게 된다. 대개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한다. 같이 공감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을 꺼내고 나서야 대화가 이어지고 어색함이다소 풀어진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 효과가 오래가지 않을 거란걸 알고 있다. 일시적 라포형성이나 스몰톡정도 수준이다.
취업준비생이 왜 직장인인 친구들 송년회에 안 나가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상황도 같다. 돈은 없고 만나면 매일 월급얘기, 회사자랑, 직장상사 험담에, 투자나 재테크 얘기만 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통장에 30만 원 밖에없고 고정수입도 없는 본인이 모임에 나갈 수 있겠나. 서로 회사 얘기하다 “넌 요즘 뭐 하고 지내?” 나오는 순간 바로 갑분싸다. 반대로 처음에 본인이 나간다 해도 모임의 멤버들은 무슨 얘기, 질문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깍두기 개념으로 모임비용이나 술값을 내주기도 갈수록 부담스럽다. 취업준비생이면 준비생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그냥 편안하게 서로 신세한탄하며 소주한잔 기울이는 게 훨씬 심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취업을 했다 쳐도 연락을 안 한 지가 이미 꽤 되어 선뜻먼저 연락하기도 망설여진다.
또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 취업한 곳이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 모은 돈은 얼만지, 재테크는 어떻게 하는지 또 그 상황에 따라 관계는 계속 변하는 법이다. 소중했던 관계가 멀어질수록 그 빈자리는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같은 이들이 그렇게 하나둘 채워간다. 이 외에도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했던가. 서울로 이사와 서울 중심부에 모든 생활권이 있어 지방에 사는 기존의 친구와는 멀어지는 경우라던지, 해외로 간다던지. 눈에 안 보여 서로를 그렇게 잊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결국은 다 상황이 달라져서 그렇다. 어릴 적 똑같은 담임선생님, 똑같은 종례시간, 똑같은 대학 기말고사, 똑같은 알바가 아니란 거다. 움켜쥐려 해도 붙잡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놓아주어야 하는 것만큼 슬픈 것이 많이 없다.
다음은 공통의 관심사가 그 이유가 된다. 내 전재산이 주식에 있고, 퇴근 후 주식투자공부를 하고, 매일 주식 차트를 보는 사람이 전재산이 부동산이고, 유료로 부동산강의를 듣는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같은 공간에서 커피 한잔을 한다 쳐도 전자는 주식이 오르고 부동산이 폭락하길 바랄 것이고, 후자는 주식이 폭락하고 부동산이 오르길 바랄지 모른다. 이런 극단적인 예시를 제외하고서도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관심도 없는 이에게 가자고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관심사에 따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나뉜다.
골프를 잘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골프를 배우라고 주변사람들에게 이가 닳도록 조언한다. 마치 사람을 끌어들여 성공하면 인센티브라도 받는 영업사원처럼. 아, 함께 라운딩을 칠 수 있는 옵션이 늘어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이들은 골프를 쳐야만 하는 이유를 천 개를 만들어내고, 골프에 무관심한 이들은 골프를 칠 수 없는 핑계를 천 개 만든다. 절대 가까워질 수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독서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독서모임에 참여하거나 모임을 직접 꾸리게 될 것이고, 그 모임에는 책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일 것이다. 모임에서 자연스레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책을 읽고 난 뒤 리뷰는 어떻게 하는지, 책을 얼마나 읽는지, 철저히 본인의 관심사에만 몰입된 질문을 주고받는다.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본인도 당연히 관심이 없다.
옷을 좋아하는 친구는 매번 만나면 쇼핑을 다니기 바쁜데 옷에 관심이 없다면 상대는 쇼핑을 노동으로 받아들인다. 누가 그런 만남을 계속 이어가고 싶겠는가. 게임, 영화, 취미 다 똑같다. 관심 있는 취향이 최소 하나 이상은 같아야 억지로 시간 내 만난다.
도움을 주는 관계도 관계를 이어가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인생에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건 실로 엄청난 것이다. 왜 한국인에게 학연, 지연이 중요시되는지는 직접 겪어봐야만 안다. 기회가 있을 때 끌어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는 관계의 영속성에 충분한 명분을 준다. 말 그대로 계속 이어가야만 내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니까.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앞에 (서로)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무조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관계여야만 그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무조건.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과 동시에 이기적이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한 사건에 대해늘 본인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 명이 일방적으로도움을 주는 관계면 상대가 부담을 느끼거나, 그 도움을 주는 당사자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본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들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의 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그 귀인은 앞에서 설명한 1번과, 2번 중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면 본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고, 관계 자체가 애초에 더 돈독해진다.
마지막으로 예외의 경우,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금전적으로 엮여있는 관계다. 돈을 빌려줬거나, 함께 같은 곳에 투자를 하거나, 함께 사업을 하거나, 자영업을 하거나, 주수입원이 엮여있는 곳에 함께 다니거나, 혹은 그곳에서 갑을관계로 있거나. 돈은 삶의 필수재다. 사람은 배신해도 돈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금전적으로 엮인 관계는 멀어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자주 소통할 수밖에 없다. 지인 중 서로 절연을 했는데도 같은 토지에 투자를 해 한 달에 한 번씩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경우도 봤고, 함께 고깃집장사를 해 가족보다 더 자주 붙어있는 경우도 봤다. 본인 상황이 힘든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또 도움을 받거나 하면 그 자체로 과거보다 더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 네 가지 경우에 해당되지도 않고, 주변에 그럴 지인도 많지 않다면 어떻게 하느냐. 스스로 혼자를 자처하게 된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누군가를 비위맞출 필요도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그저 내가 하고싶은 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가뜩이나 바쁜 현대사회에서 피로도가 쌓이는 와중에 사람한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너도 나도 혼자이기 때문에 혼자라고 조롱하거나 비아냥대는 사람도 없다. 그게 본인을 더 가꾸고 재충전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내 시간은 돈과도 맞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혼자가 된다. 혼자는 어느새 익숙해지고, 혼자가 아닌 것에 오히려 불편을 느낀다. 온전히 본인을 더 가꾸는 시간을 서서히 늘린다. 더 똑똑해진 것이다.
이젠 혼자라고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게 아닌 존중과배려가 깃든 ‘건강한 개인주의’의 시대가 하루빨리 도래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