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함정에 대하여
30대 후반의 누군가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하나 봤다.
"30대 후반인데 9급 공무원 12호봉입니다. 저 잘 살고 있는 거 맞나요?
이 외 글쓴이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자산이 얼마고, 결혼은 했는지, 어디 사는지, 성별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나이와 직업만 알고 있다. 이 글쓴이는 의도는 뭘까. 내가 글을 쓴 것이 아니기에 100% 알 수는 없지만 의도는 이 정도 나이에, 이런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적당한' 수준인지를 알고 싶은 걸로 유추할 수 있다. 돈이 얼마 있든,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족한지는 둘째치고 그냥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현대인과 비교했을 때 '적당한 수준인지'만 확인되면 그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뭘까? 당연히 없다. 상대적인 문제다.누군가는 충분하다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오히려 대단하다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30대 후반 치고는 직업이 너무 평범하거나, 만약에 미혼이라면 결혼시장에서좀 부족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정답이 없는 주관식 앞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은 늘 최고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보다 더 나은' 상태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 무조건 적당히 가고 싶어 한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 이런 현대인의 사고가 바로 '평균 올려치기'를 낳았고, 그것이 대중화되어 현대인 모두가 그 기준에 맞추려 삶을 고통받고 있다.
최근에 과거 직장을 함께 다녔던 형도 그랬다. 회사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형도 똑같은 말을 한다. 조용히 회사에서 나대지 않고 '중간'만 가고싶다고. 그냥 티 안 나게 조용히 있고 싶다고.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간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뒤처지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게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한다. 모두가 이렇다. 특히 공공기관, 민간기업 등 기업 종류를 막론하고 조직생활에서 이런 사고는 더 두드러진다. 대체 왜?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도전했다가 만약이라도 실패한다면, 삶이재기 불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기에 조금이나마 남들보다 낫거나, 뒤처지기 않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균 올려치기를 조장하거나 신봉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최소 비슷하거나 더 나은 상황을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에서 대체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 기준자체가 상향평준화되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이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자처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이번 인생은 망했다며 자조한다. 이건 학력, 일자리, 자산, 키, 몸무게, 외모, 상대적으로 타인과 기준을 매길 수 있는 모든 것에 그대로 적용된다. 돈이나 자산 같은 숫자면 더 편하다.
한국의 중위소득은 약 260만 원 정도다.(2022년 기준). 중위소득은 말 그대로 가장 소득이 낮은 사람과, 가장 높은 사람의 중간값이다. 이 중위값 즉, 중산층 기준을 높게 잡으면 사회적 기준도 함께 높아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중산증의 기준과 소득 상한선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평균 올려치기에서 돈이 하나의 큰 화두가 되는 게, 결국 돈은 숫자로 표기되기에 본인의 지위를 나타내기 편하고 순위를 매기기 쉬워서다. 결국 현대인의 삶엔 결국 뼈 빠지게 일해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만 그렇게 남게 된다.
한마디로 10년 전 월급 500만 원이었던 사람이 월급쟁이의 최정상이었다면 지금 500만 원은 중산층은커녕 직장인의 평균이 돼버려 스스로 이 월급이 (실제로는) 많은 데도 불구하고 타인과 비교해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근데 한국사회가 기이한 것이 있다. 내가 만약 10억이 있다고 해보자. 10억이 있다는 그 높은 숫자에 희열을 느끼는 게 아니라 남들은 1억인데 본인이 10억이라서 희열을 느낀다. 로또에 당첨되면 벼락부자가 돼서 행복한 게 아니라, 남들의 자산은 다 올라가는데 아, 로또라도 당첨됐으니까 나는 벼락거지를 면할 수 있다는 것에 거기서 행복과 안도를 느낀다. 한국인은 타인에 대한 인정욕구, 평판, 시선에 평생 자유로울 수 없는 민족임과 동시에 너무 튀지 않고, 실패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중간 이상으로 안정적으로 잘 사는 것에 목메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수도. 아래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대학은 건국대 정도는 가 줘야지'
'남자면 키는 180 넘고 75킬로 정도가 딱 적당해'
'35살 정도면 최소 못해도 평균 1억은 있어야 하지 않아?'
실제로 건국대 정도면 대학입시 상위 10% 이내 성적인데, 인터넷 안에서는 인서울 아래 수준의 대학교를 안 다니는 사람이 없다. 적당한 상위 계층. 10% 이내. 그게 평균 올려치기의 핵심이다. 키가 180 이하가 없으며, 모두 다 대기업을 다니고, 자산은 1억 이상 보유 중이고, 이쁜 여자친구가 있으며 근사한 곳에서 결혼이 예정되어 있고, 부모님의 노후가 모두 준비되어, 결혼할 때 서울에 자가로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정도가 막 과하게 재벌은 아니라도 실제 대한민국 삶에서 5~10% 정도 안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준이 잡혀있고, 그 상위 평균에 본인이 속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실제로 밖에 나가 현생을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을 찾을 확률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알바경험이라도 있는 사람은 안다. 음식점이든, 카페든, 특히 서비스직. 예의 없는 사람들, 본인만 생각하는 사람들, 경우 없고 말 그대로 이토록 우매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많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 달도 채 안 걸린다. 온라인도 마찬가지. 국가 재난 수준의 사고소식에도 정치 얘기를 하며 본질을 흐리고 선동질하는 사람들, 익명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다 똑같다.
'어떻게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사람들이 주변에 그렇게나 넘쳐나는데, 우리가 정답이라고 그 기준 잡아놓은 상위 평균은 이상과 한없이 동떨어져있다. 실제로 상향된 평균기준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 얼마나 될까. 현대인은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정해두고,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고생해서 사는 꼴이다. 참 개탄스럽다.
평균 올려치기는 신혼여행 비행기를 탔을 때 설렘 같은 것.
해변에서 즐기는 한잔의 모히또 같은 것.
백화점의 쇼핑 같은 것.
딱 그냥 그 정도인 것이다. 잠깐인 것.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고, 그 일시적인 쾌락에 중독처럼 젖어든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 자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사라진다. 행복했고, 황홀했지만 결국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럼 그 쾌락을 느낀 당사자는 어떻게 할까? 그 잠깐의 쾌락을 영원히 추억으로 간직한 채 다시 검소한 삶, 평범한 본인의 진짜 삶으로 돌아갈까? 절대 아니. 쾌락이 사라짐과 동시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고, 또 더 센 걸 바라고. 그렇게 계속 가다가 본인의 눈이 높아진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그 평균은 올라가고, 그 다수가 모두를 일반화의 오류에 빠트려 그게 어느덧 아주 무섭게도 '평범한 사람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어차피 다 이 평균 올려치기는 인간이 만든 가상현실일 뿐이다. 그 기준이란 결국 다수의 인간끼리 합을 맞춘 것뿐이다. 중산층의 기준이 국가마다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선 악기를 하나 이상 다룰 줄 알고, 상대를 초대할 근사할 요리 하나 이상 할 줄 알고, 봉사를 할 줄 알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주제가 있는 것 등을 중산층 기준으로 삼는다. 영국은 열정적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하나 이상 있어야 중산층에 포함시킨다. 근데 한국은 어떤가?
중형차 세단은 하나 있어야 하고, 32평에는 살아야 하고, 그 집은 너무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 자가여야 하고,금융자산은 얼마 이상이어야 중산층으로 평가해 준단다. 누가 정한 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 불특정다수가정한 그 기준만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뭘 하나 먹을 때 원산지는 그렇게 따지면서, 몇 칼로리인지는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보면서 이런 건 아무 말 없이 잘만 따른다.
직업으로 정한 위의 계급도만 봐도 현실에서 현대인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생각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대충 맨 위에는 고시합격자, 그 밑은 전문직, 그 아래는 대기업 및 이름 있는 회사를 다니는 직업이다.
근데 이건 ‘직업’만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고 지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는 곳, 학벌, 자산, 하물며 대기업 상위 건설사, 중위건설사, 공공 건설사로 분류해서 아파트 브랜드 이름까지도 기준 세워 순위를 매길 수 있다. 소름이 돋지 않는가?
사실 이 모든 건 없어도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이 자본주의에서는 그냥 각자 수준에 맞게 본인이 편하게 그렇게 살아가면 그뿐이다. 본인이 불편한 게 아니라, 본인을 지켜보는 상대가 불편하고 동일선상에서 취급받고 쉽지 않기에 그런 기준을 삼아 깎아내리고 깔보고 계층을 정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다 필요 없다. 그냥 본인이 현재 병원에만 안 누워있다면 되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예시로 실제로 병원에 계신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불편하실 수도 있다. 근데 맞는 말이다. 건강만 하다면 아니, 설령 병원에 현재 계셔도 곧 회복될 수 있고, 돌봐줄 사람이 있고, 행복할 미래가 그려진다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다.
차가 없든, 집이 없든, 자산이 없든, 본인만 행복하면 그뿐인 세상. 근데 현대인에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그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의 상향평준화된 기준이 절대다수를 힘들게 한다. 마치 어릴 적부터 교과서에서 배워 암기했던 수학공식처럼, 누군가에게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인생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은 그 잠시조차 머물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평균 올려치기’가 본인 스스로에게 필요 없는 거라면 굳이 애써서 올릴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내가 안 하면,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 상향평준화된 기준조차도 언젠가는 낮아지겠지. 그래서 나는 애초에 필요한 것만 마련해 두는 것이고, 그 필요한 것이 사라져 삶이 불편할 때에만 노력해서 다시 만들어놓는 편이다. 그게 소비가 됐든, 자기 계발이 됐든, 뭐든. 절대 다 갖추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 몇백억이 있는 부자들은 본인을 치장하고, 특정 자산으로 본인을 치켜세우고 하는데 대부분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오히려 더 아끼고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쓴다. 압구정, 강남 부자들 보면 다 겉으로 수수하다. 오늘자 내가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도 이런 인터뷰를 했다.
"나는 사실 소문과 다르게 차도, 옷도, 시계에도 일절 관심이 없다"
요즘 오징어게임 2가 공개되면서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이 왜 전 세계에 히트를 쳤을까. 왜 차기작이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자. 우승하면 456억을 주기 때문이다. 피 튀기면서 참가자 몇백 명이 그렇게 죽어가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승자는 '결과적으로' 456억을 받기 때문에 그 파격적인 보상 때문에 인기가 많은 것이다. 꼭 돈뿐만 아니다. 왜 우리는 언제부터 과정에 대한 그 어떤 고려도 없이 결과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됐을까.
어떤 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수능에서 본인 실력발휘를 못해서 지방대에 갔다 치자. 왜 그가 했던 모든 노력을 물거품이 되는 것이고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걸까. 부모는 그렇게 돈 들여서 학원을 보냈는데 왜 서울대 못 가냐고 다그친다. 마찬가지로, 갈수록 늦어지는 결혼시장에서 심지어 본인이 소개팅을 시켜준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연애를 하고, 어떤 상대를 바라는 지도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으면서 왜 결혼 언제 하냐고 묻는 걸까. 왜 이렇게 늦게 하냐고 묻는다. 늘 과정은 묵살한 채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 같지도 않은 정답을 향해 우리는 계속 가고 있는데 심지어 그 정답과는 점점 더 요원해진다. 총체적 난국.
그럼 결국 어떻게 해야 되냐고? 자, 이 평균 올려 치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공동체 결속? 구성원 간 연대감 형성? 뭐 다 좋은 말이다. 근데 한국은 국권침탈이나 경제위기 같은 ‘국가’가 중점이 된 사건에만 이 공동체 결속이 이루어져 왔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시대에 특정집단을 묶어 공동체결속을 이끌어낸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의 각자 주어진 환경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부재다. 취업, 학업, 유학, 결혼, 경제적 상황 등 여러 요인에 의해 현대인은 자주 본인이 속한 소속이 바뀐다.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 나는 개개인이 관계에 있어 서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게 우선시 돼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내 차는 소나타고, 너 차는 포르쉐야. 네가 더 잘 벌고 잘 사는 것 같아. 거기서 질투와 시샘,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너도 너 나름대로 고생하면서 그렇게 잘 살아내고 있구나. 힘들게 보상받았구나.
그렇게 연민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 쌍방향적으로. 부부싸움도 똑같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하루종일 애들 밥 먹이고, 학원 보내고, 집 치우느라 너무 고생했겠네"라는 연민.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하루종일 직장상사에게 시달리면서 스트레스받았을 텐데 너무 고생했겠다"
라는 그런 연민. 그 가정은 100% 아니, 200% 화목하다고 자부한다.
청년들은 전부 수도권 원룸 살고, 부모한테 돈 빌려 쓰고, 경제적 자유라는 근사한 단어 끌어다가 코인이나 주식 한탕을 노린다. 자기 객관화가 결여돼 일은 하지 않고 대기업 등 보상 높은 것만 보는 와중에 옷과 신발 명품하나 그리고 최신 핸드폰은 또 있어야 한다. 삼각김밥 먹으면서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대체 그들이 왜 이렇게 사냐고?
상대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 나아지게 보이고 싶어서. 근데 그런 박탈감과 열등감, 경쟁심을 제거하고 서로 연민의 감정의 시작이 이 왜곡된 ‘평균 올려치기 사회’를 조금은 더 나아지도록 만들 수 있다.
상대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는 건 본인에게 무언가특출나게 가진 것이 없어도, 누군가가 평균을 더 올려쳐도, 부럽지 않으며 부족하다 여기지도 않은 그런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나만의 목표만 세워서 가면 된다. 그리고선 혐오, 증오의 생성보다 연민에 집중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그 말도 안 되는 평균 그리고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역치는 점점 더 낮아질 수 있다.
경제학에서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왜 따로 배우나. 인생도 똑같다. 좁을땐 좁게, 멀리 볼 땐 멀리 거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본인이 바라는 그 목표와 꿈은 조금씩 시간을 들인다면 분명히 이룰 수 있다. 물론 아주 조금의 운은 따라줘야겠지.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운 없는 사람은 평생을 해도 안되니까. 남들이 바라는 자극적으로 도파민 묻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건 사실 평균이 아니다. 그걸 하루빨리 아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인생이란 게임을 펼친다. 그 평균은 절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천천하고 꾸준한 시간투자의 '복리'의 개념을 인지하고, 그 시간투자로 벌어들이는 내 능력, 교양, 자산, 지식, 지능, 판단력과 통찰력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수반된 상태에서 상대를 연민하는 감정이 더해지면 그게 곧 인생에 행복이다. 평균 올려치기에서의 그 정상의 자리를 찍은 사람보다 이런 사람이 훨씬 더 앞으로 행복할 거라 자부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우린 실천을 안 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