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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Dec 31. 2024

나는 또 그렇게 손절했다

손절이 일상이 된 사회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주변엔 모두 당장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해목표를 세우느라 바쁘다. 누군가는 자격증을 따고, 누군가는 월 수입을 올리려 하고, 글쓰기, 운동 등 각자가 꾸준히 하고 있는 분야에서 현재보다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세운다. 실현가능한 범위 내에서 각자 본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의 최선을 바란다. 사실 목표는 달성을 해야만 마침표가 찍어지는 게 사실이나,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올해보다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의지가 있다는 걸 내포하거든. 그래서 목표만 세워도 사실 기분이 좋다.

각자의 목표에 대부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관계다. 새해에는 누구를 더 가까이하고, 누구를 멀리할지 머리를 굴린다. 대개 현대사회는 상부상조, 즉 일방향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쌍방향적으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가 계속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관계 자체가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과 돈에 비례한 유희나 의미 있는 결과물이 없으면 손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정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앞으로 더 심하면 심했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숫자’가 지금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의 지표가 되는 세상이다.

그 숫자는 돈이나, 업에서의 성과, 금융자산, 부동산 시세, 자동차 가격, 내가 입은 옷 가격 등 본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곧 숫자로 할 수 있는 것 즉, 숫자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양산하는 논리기에 내 숫자를 줄어들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래서 관계는 서로의 숫자, 그게아니라면 숫자와 상호교환할 수 있는 유희나 의미를 내포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하냐고? 손절을 한다. 카카오톡 메신저에 필요 없는 이름을 삭제하거나 차단하고, 더 이상 본인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다.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노력 자체가 손해라고 생각되기에 먼저 선수 쳐 제거하는 것이다.


‘손절’의 본래 뜻은 주식시장의 손절매에서 유래했다. 주식에서 앞으로 주가가 더욱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단기간에 가격상승이 기대되지 않는 경우, 현재의 손실을 감수하고 파는 일이다. 관계에 대입하면 앞으로의 손해가 더 예상될 때, 내 인생에 이익이 더 기대되지않을 때 현재의 손해를 감수하고 끊어버리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손절이 대중화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공간부족이다. 철저히 본인만의 공간부족.

직장인 A가 있다고 하자. A는 결혼을 했고, 자녀가 한 명 있으며 평범한 직장에 다닌다. 경기도에 거주하며,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 자 이 정보만 주어진 경우, 단순생각만 해봐도 이 A의 일 년 라이프 패턴이 저절로 그려진다. 아래를 보자.


월요일~금요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만원 지하철 혹은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칼퇴한다고 해도 퇴근하면 도어투도어 최소 8시.

*회식이 있는 날은 빨라야 10시, 친구를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하면 11시~12시. 약속이 있거나 회식이 있는 날을 최소로 잡아도 주 1회.

토요일: 기본적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자녀와 놀아주거나, 가끔 놀이동산이나, 가까운 근교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일요일: 교회에 가거나, 운동을 하거나, 짬 내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한다. 이마저 귀찮다면 넷플릭스 혹은 소파에 누워 TV리모컨을 돌리기 바쁘다. 내일 또 출근이니 체력을 비축한다.


이렇게 짜인다. 다른 건 추가하지 않고 최소로 ‘생계’만을 위해 잡은 대략적인 일주일 스케줄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해 평일 집에 와 운동이나 공부라도 한다면 자녀와 놀아주는 시간을 포함하면  곧장 잠에 들어야 한다. 온전한 본인만의 쉴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가장 일반적으로 직장인을 예시로 들었지만 자영업, 학생은 더하다. 학생은 현대사회의 숨 막히도록 치열한 입시경쟁에 녹아들어 야간자율학습이니, 학원이니 뭐니 해서 최소 기본 밤 11시는 돼야 집에 돌아온다. 자영업자는 쉬는 날이 아예 없다. 직장인 토요일, 일요일처럼 일주일에 2회 이상 쉬는 자영업자가 있다? 현실적으로 말해 그 자영업은 매우 장사가 잘 되거나, 원래 집에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믿는 구석이 있거나 이 셋 중 하나다. 쉬면 본인이 투자한 인건비나, 전기세나, 각종 공과금이 그 쉬는 날만큼 마이너스되는 거나 마찬가지라, 대개는 일주일에 여섯 번 일곱 번 다 출근한다.


자, 이 와중에 이들이 가족 제외 본인 주변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면서, 가족을꾸리면서 자연스레 해야 할 일은 많아지고 책임감은 막중해 가는데 이에 비례해 지인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매정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결국 본인이 생각하는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만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다. 즉, 주변에 관심을 기울일만한 마음의 공간이 부족해진다. 집 안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스케줄이든, 내 뱃속이든 뭐든 여백이 있어야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배불러 죽겠는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다한들 그걸 먹으면 맛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토 안 하면 다행이다. 맥시멈리스트가 집안이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로 가득한데 아무리 값비싼 무언가를 집에 들인다 한들, 그 물건이 그 자체의 매력과 효용성을 100% 그 집에서 발휘될 수 있을까.

사람도 똑같다. 본인이 매 순간 바쁘고, 힘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거다.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대한민국 취약계층의 복지문제나, 범죄이슈,빈부격차, 이분법적인 정치 공약에 대해 심도 있게 관찰할 수 없고, 그냥 넘기고 싶은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나랑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으니까. 공동체의 의미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현대사회에서 본래의 사람 성향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의 성향 자체는 동일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성취감 및 만족감을 얻는다. 은둔청년 50만 시대, 그들은 왜 방안에 고립되어 우울감을 느낄까?이 사회에 존재하면서 본인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외부로 나올 수 있는 용기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 모두가 타인과 상호작용을 꿈꾸나, 그 방식이 변화된 거다. 그럼 어떻게 방식이변화했는가. 관계의 생성은 누구나 원하지만 그 관계의 영역이 ‘비현실적으로’ 좁아져가는 게 그 원인이다. 그래서 손절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큰 손해와 인생에 있어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표현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일상생활에서도 현대인은 다소 쉽게 사용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 봐도 주변에서 손절을 하는 사례가 일주일에 한 번은 최소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돈에 너무 인색하다고 손절하고, 결혼을 하더니 사람이 이기적으로 바뀌었다고 손절하고, 본인 인생에 이래라절해라 참견하며 훈수질을 한다고 손절하고, 타인의 인생이 잘 풀리는 것에 시샘과 질투를 느껴 그게 행동으로 드러나 손절하고, 본인 자랑만 일삼는다고 손절하고, 약속 안 지킨다고 손절하고. 관계가 쉽게 생성된 만큼 손절도 너무 흔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 당연히 상대에 대한 존중이 결여됐거나, 불편함이 계속되거나 하면 그 관계는 그만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대인은 이외에도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손절하는 게 장기적으로 인생을 볼 때 훨씬 더 유리하다고 쉽게 판단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그렇게 현대인은 더 똑똑해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내가 준만큼 그대로 돌려받는다는 정의가 성립되기까지 현대인은 타인에게 그렇게 호의적이고 관대하지 않다. 그게 핵심이다.

결혼을 해본 사람은 안다. 내가 십만 원 축의를 하면 그대로 상대가 십만 원을 축의 하는 게 당연한 도리다. 과거에 누가 내게 이십만 원을 했으면 내가 그 사람이 결혼할 때도 이십만 원을 하듯. 경조사 비용은 어쨌거나 차변 대변 금액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고 곧 마음의 크기거든.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 나도 그랬고, 놀랍게도 이게 흔하디 흔한 현대인의 손절 사유가 된다. 그 몇 푼 안 되는 한낱 결혼식 축의금 하나로도 이렇게 상호 간의 암묵적인 거래가 깨지는데, 상대에게 내가 기대한다고 해서 그 기대의 크기만큼 정확히 돌려받는다? 현대사회에서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이가 있다면 평생을 함께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더 이상 손절은 나쁘다고만 보기 힘들다. 오히려 관계의 재형성에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모두가 더 두려워하니, 그걸 적극적으로 하는 행동 자체가 큰 용기라는 것이다. 이 사람과 계속 장기적으로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이어가고 싶다는 그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 거대한 결심이다. 열명한테 1씩 마음을 주다가 그 에너지를 한 사람에게 10을 준다고 해보자. 그 10을 받은 상대는 본인이 얼마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금방 눈치채고 감동을 받을 것이다. 서로에게 더 각별해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손절, 아니 손절이 아니라도 누군가와 거리를 둔다는 것은 겉으로 부정적인 결과로 비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긍정적이다.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관심이 상존하기에 상대에게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본인 또한 관계에 집중하는 노력과 에너지가 줄어들어 그 에너지로 다른 본인 관심분야에 집중할 수 있다. 물론 객관적으로 사소한 일로, 혹은 감정적인 상태에 짓눌려 쉽게 손절하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타인에게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전제됐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제 이 거대한 결심을 조금씩 늘려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가까이할 두려움이 증폭되고 그 결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면 본인 스스로 고립되고 편협한 사고가 자리하기 시작한다. 이는 단연 사회와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본인이 결심했다 해서 마음먹은 대로 다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를 가까이할 거대한 결심은 본인이 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고, 도움 되는 그런 사람이어야겠지. 이런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 사회전반의 신뢰 수준도 충분히 높아지지 않을까.





이 거대한 결심으로 사랑하는 내 주변인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구독자분들에게 전합니다.

올 한 해 제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내년에 더 좋은 일 가득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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