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시> 리뷰
무언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서 끝내 목표를 성취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경외심이 든다. 미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 자체가 현실에선 상위 1%니까. 그게 무한경쟁사회에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폭제일지도 혹은 개인이 겪은 경험에서 점철된 결정적계기든간에 결과론적인 면에서 일단 ‘성공’했기에 더 많은 이들의 축하와 찬사를 받는다. 한국사회는 유독 이런 문화에 젖어있고, 모두가 최고가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각자 자리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해낸다. 심신을 갈아서라도. 그리고는 그냥 조금 쉬는 사람들,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숫자로 평가받는 이 세상 모든 결과물 중 그저 그런 성적표를 받아 든 이들을 조롱한다. 다쉬어서,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오죽하면 해외여행을 가서도 자기 계발의 의미를 찾으며 합리화하겠나. 그냥 놀거나 쉬지 못하고 무언가가 본인을 성장시킨다 믿으며 살겠나. 그렇게 금전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그저 그런 위치에 선 이들은 자연스레 루저가 된다.
'1등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더러운 세상'.
한 때 광고로 온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이 문구는 끔찍하게도 현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딱 하나 대중들이 간과하는 건 저 카피처럼 2등은 그 모두에게 잊힐 수 있지만, 어떻게든 노력으로 1등을 거머쥔 위너한 사람만은 2등을 기억한다. 나랑 아주 비슷한 실력, 비슷한 노력 그리고 어쩌면 운이라는 하나의 요소만으로 내가 1등을 거머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걸 본인은 알거든. 2등도 그 위치에 오기까지 본인과 상응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경험으로 이미 체화하여 알고 있다. 그만큼 2등이라고 해서 루저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이 한국사회에서만 결여돼 있다. 이런 획일화된 경쟁사회에 길들여진 대중들에게 '위플래쉬'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플레처는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 세이퍼음악학교의 밴드 수장이다. 본인의 명성과 음악에 대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실력 있는 학생들을 골라 혹독히 교육시킨다. 앤드류는 그중 한 명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보기 힘들 정도로 거북하고 불편한 시퀀스 대부분은 플레처가 그만의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앤드류를 학대하는 장면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지나치게 편하고 현실세계의 순한 맛 내러티브를 보이는 '라라랜드'와 정반대 즉, 낭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매운맛을 심도 있게 그려낸 새로운 시도를 했고. 이 새로운 시도는 대중에게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현실에서 노력과 열정에 대해 다양한 인사이트를 도출할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 혹독한훈련 속에서 앤드류는 고심할 시간도 없다. 어떤 고심?
'음악인으로서, 드러머로서 최고가 되는 것'이 꿈이 단지 본인이 진정으로 원해서 생긴 본인만의 음악적 템포인지, 아니면 플레처라는 스승에게 길들여진 가짜세계의 템포인지. 그렇게 정답을 찾지 못한 채 처음 열정으로 시작했던 본인만의 템포는 서서히 플레처에게 맞춰진다. 그리고 본인은 그 과정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데, 좋아했던 연인과도 이별하고, 몸에 피가 나도록 드럼을 치고, 교통사고를 당하면서까지 본인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에게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준다.
플레처는 학대를 신고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한 재즈카페에서 우연히 앤드류를 만나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리고 앤드류는 이를 승낙하고 마지막 연주를 하는데예정에 없던 새로운 곡이 나오고 앤드류는 당황하나 자신만의 소름 돋는 드럼연주로 대중들을 매혹시킨다.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플레처가 앤드류를 속여 중요한클라이맥스에 함정을 빠트린 이유는 열린 결말이다. 정녕 스승으로서 앤드류의 진짜 숨겨왔던 실력을 일으키기 위해서일지도, 혹은 본인을 밴드에서 쫓아낸 소심한 복수일지도. 중요한 건 앤드류는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끝내 본인만의 템포로 최고의 연주를 선보였다는 것. 여기서 감독은 플레처를 자본주의의 하나의 심벌로 형상화하면서 진정으로 이 자본주의 속우리는 성과와 본인의 꿈에 대해 어떤 사고로 접근해야 하는지 대중들에게 묻는다. 과연 혹독한 과정을 억지로 인내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과연 개인의 행복을 차치하고서라도 누구나 인정하는 옳은 삶인지, 아니면 앤드류의 마지막 연주처럼 본인이 만족하는 본인만의 초인적인 결과물을 내는 것이 옳은결과인지. 정답은 없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서는 대다수가 전자에 많이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6세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4살, 5살부터 학원을 다섯 개, 여섯 개 보내며 아이들을 뺑뺑이 시키는 건 과연 정상적인 교육과정일까, 학대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본인의 꿈만을집착하는 이들은 열심히 사는 성실한 사람일까 소시오패스일까. 이 성공주의에 취해있는 이들은 어느덧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되면 돼'라는 일방향적이고 편협한 생각으로 현대사회를 더 건조하게 한다. 더 소름 돋는 건 이 영화를 본 한국 대중들은 영화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나태해진 삶에 새로운 자극제가 됐다' 혹은 '미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절대적인 정답이 될 수 없으며 미치지 않을지언정 본인만의 기준의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 기준만으로도 앤드류의 마지막 연주처럼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영어단어를 외우고, 퇴근 후에는 운동을 가야 하며, 새벽에 일어나 책을읽고, 청년들에게 '갓생'이라고 불리는 이런 삶이 만약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현저히 비효율적이기에 사실 최상의 결과를 가지기도 어렵다. 그럴 시간에 맛있는 거 하나 먹고, 참아왔던 본인이 사고 싶은 것 하나 사고, 바쁘더라도 하늘 한번 보는 것이 삶의 질과 행복도 측면에서는 훨씬 더 우위에 있다.
더 이상 플레처의 템포가 아닌 앤드류처럼 본인만의 템포를 하루빨리 가져오는 것. 이 영화를 본 대중들도 누군가 바라는 목표와 결과에 본인을 끼워넣기보다는 나만의 방식, 나만의 주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해 보는 계기를 삼게 하는 것이 감독이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일지 모른다. 플레처는 이 주제를 꾸며줄 조연에 불과하다. 과연 플레처 같은 조력자가 정당할까? 교육과 성장이라는 가면 아래 학대의 대상화하고 조롱을 정당화하는 것이 스승인지 소시오패스인지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한다. 진짜 지도자는 강압보다는 내면의 실력과 동기를 이끌어주는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미쳐야 성공하고, 본인을 학대하면서까지 끝까지 인내해야 밝은 결말이 있다는 원론적인 답보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우리에게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양적인 질문은 이거다.
나는 도대체 앤드류처럼 어디에 이렇게 미칠 수 있는가
무엇을 더 좋아하고, 무엇에 '몰입' 했던 때가 까마득한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걸 찾아가는 것이 삶이고, 이미 찾은 이들은 내가 굳이 미치지 않아도, 심신을 갈아 넣지 않아도 그걸 하는 자체가 곧 행복이기에 앞선 질문에 대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격이다. 그 자체가 삶에서 큰 행운이고 복이다. 앞서 말한 상위 1%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고 싶어요’는 본인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러지 못할지언정 생각은 해본 적 있냐는 거다.
주변의 평가와 채찍질에 내 자아가 눈이 멀었다면, 위플래쉬 영화는 새로운 시야를 선물한다. 제발 정신 차리고 나만의 것을 한번 찾아보라고. 내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이 질문은 필수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이다.
나는 무엇에 내 전부를 걸 수 있나?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는 한 인물을 보면서 이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억지로 책임질 걸 지키기 위해 참고 있는 걸지도.
전 세계 백억 명이 산다 치면 백억 개의 삶이 있다. 오천만 대한민국에는 오천만의 삶이 각기 존재한다. 각자의 우주 속에 우리는 살아가기에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정답은 규정하기 물론 어렵다. 그래서 감독도 열린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도 딱 한 가지 생각해 볼 인사이트는 결과를 떠나 내 자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 분야에 노력을 해봤냐 안 해봤냐의 차이 아닐까. 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바닥을 찍고 다시 일어나는 데 조력자의 도움이 있을 수도 있고, 실력이 뛰어나도 운이 없어 고꾸라질 수도 있는 것이 인생. 마지막 앤드류가 어디에 홀린 것 마냥 드럼을 연주하는 장면의 카타르시스는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진짜 시너지는 삶에서 본인만의 창의성구현이 더 값지다는 걸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한 분야의 괄목한 성장도 결국 내 자아, 내 삶이 동반되어야 만 의미 있다는 것.
누구나 안 맞는 사람은 만날 수 있다. 그게 가족이 될 수도, 인간관계가 될 수도, 직장에서 만나는 상사가 될 수도. 어떤 관계든 인간미가 결여된 성과나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면 목적자체가 상향평준화되고, 이런 목표의식이 내재될수록 내부 간의 갈등만 수반된다. 나폴레옹, 이순신, 세종대왕, 역사 속의 모든 위인들이 혼자성과를 내서 모두가 만족할만한 그런 결과를 냈을까? 본인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본인의 한계는 본인만 규정할 수 있다는 결과에 우리는 도달한다.
성취, 성과에만 가려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걸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성취 끝엔 공허만 자리할 것이다. 성장도 내 삶이 동반돼야 성장이다. 이 영화를 보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이 있다면, '피할 수 없으면즐겨라' 대신,
피할 수 없으면 최대한 피해라
이건 단순한 음악영화가 아니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이루기 위한 맹목적인 노력 그리고 조력자의 진짜 정의에 대한 의문점을 남기는 최고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