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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

by 홍그리

영화 처음과 끝까지 수위 높은 몰입도와 적당한 긴장감을 놓지 않게 만드는 서스펜스는 분명 이 영화에서만 가능하다. 잔혹하고 끔찍한 살인마 안톤 시거, 보안관 에드 톰벨, 사냥꾼 르웰린 모스 등장인물의 아슬한 삼각지대는 시청자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건 이 세 인물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연출하면서도 단 한 번도 동일한 화면 안에 들어온 적 없다는 사실이다. 2시간의 영화를 30분씩 네 번 나누어 아껴서 본다 해도 점점 리드타임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남은 시간을 체크해보곤 했다.

주인공 르웰린은 사냥꾼으로, 우연히 마약거래현장에서 200만 달러의 돈가방을 발견하고, 그 돈가방을 들고 도망가는 와중에 살인마 안톤 시거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안톤시거가 남긴 발자국에 보안관 에드 톰벨이붙는다. 사건현장에 나타난 보안관은 늘 한발 늦다. 사건이 터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등장하는데, 빠르게 바뀌는 세상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노쇠해진 본인의 모습에 절망감, 무능함을 느낀다. 이 추격전에서 안톤 시거는 시선을 오래 두기가 불편할 정도의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다. 본인을 죽이러 온 킬러뿐 아니라 사건과 전혀 연관성 없는 주변인을 ‘운명’에 기대어 습관적으로 살인한다. 어디에 홀린듯한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소를 사냥하는 공기총으로 소음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운명론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들에게 특정 의문점을 남기는데, 본인이

200만 달러의 돈가방을 손에 쥐든 안 쥐든 이 추격전과 상관없이 모든 인물을 운명에 기대어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일 수 있냐는 것. 르웰린에게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돈을 주면 아내는 살려준다는 조건을 뿌리친 이 운명을 기억하고 있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아내를 죽일 때 그 근거를 대며 잔혹하게 살해한다. 영화에서 아내는 당당했지만 그 자리에서 제발 살려달라고 아내가 구걸했다한들, 어차피 그녀는 그가 제시한 운명에 의해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던 것.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목은 잔혹한 살인마 안톤시거는 단순히 우리에게 운명을 가장한 위기 즉, 어떤 해프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을 말하고 있다.

자, 생각해 보자. 누군가 갑자기 나를 죽일지 말지, 동전의 앞뒤를 던져서 정하려 한다. 그럼 내가 죽을 확률은 50%겠지. 근데 답은 틀렸다. 왜냐. 나에게 이 살인마가 예정에 없이 ‘갑자기’ 나타나 동전의 앞뒤를 정하라고 한다. 이건 내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위기다. 50%의 확률로 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으니까. 르웰린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는 이 영화에서 불확실성을 상징하며, 사냥꾼 르웰린은 철저히 리스크를 테이킹 하는 일반 서민을 표방한다고 본다. 그는 영화에서 그저 바보같이 돈가방을 들고 튄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면 감독은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할 이유가 없었겠지. 그는 어떤 위기일 때 어떻게 대처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상황판단능력이 일반인보다 매우 우수한 사람이다. 평소 사냥을 하며 여러 돌발상황을 경험했겠지. 예를 들어, 극 중에서 살인마가 쫓아올 걸 알고 미리 모텔을 두 개 잡는다거나, 돈가방을 환풍기에 올려 다른 방으로 이동시켜 눈속임을 한다거나, 돈가방에 있는 위치추적장치를미리 알고 뺀다거나, 아내를 미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시킨다거나 모든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근데 그는 결국 빈틈을 보였고, 갱단은 그를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리스크테이킹을 적절히 하면서 수익을 내는데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안톤 시거가 ‘갑자기’ 찾아온 거다. 그런데 아뿔싸. 그 완벽을 가장했던 끔찍한 살인마 안톤시거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한다. 좌측과 앞의 도로를 유심히 보며 운전을 했는데 오른쪽도로를 보지 못한 것. 영화는 마지막에 관객에게 이런 물음을 남긴다.

불확실성에 완벽히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하는가?


살인마 안톤 시거는 왜 마지막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까. 사람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서 소비자가 재화를 얻을 때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면 효용(만족)이 급감하는 것처럼, 추격전 최후승자인 그마저도 갑자기 찾아온 불확실성을 완벽히 대비할 수 없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다른 스릴러랑 다른 점이라고 하면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가 보안관 벨의 입장에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 셋이 한 씬에 있지 않고도 이런 긴박함과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을 함께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래된 동료와 사랑하는 아내, 오래된 집이 있다. 기성세대의 상징 전형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두 인물 르웰린은 리스크를 테이킹 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안톤시거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둘 다 본인과는 전혀 맞지 않고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본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통제된 안정을 내팽개치고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왜 테이킹해야 하는가. 영화는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이 질문을 열린 결말로 마무리한다.

그 어떤 삶도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고의 정답은 없다. 주인공이 내리는 순간의 선택들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논리에 묻히는 것도 과연 절대적일까? 운명 앞에서 결국 얼마나 인간은 무력한가. 우린 그 운명을 거스를 순 없을까? 각자 정해진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영화로 관객은 빠르게 바뀌는 시대적변화 속에 인간의 탐욕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지 거대한 철학적 물음에 직면한다.

르웰린은 아무리 열심히 본인이 리스크 테이킹을 하면서 그 돈가방을 지키려 하나, 거대한 불확실성의 살인마 안톤 쉬거에게 허무하게 죽는다. 그 순간 지난 리스크를 테이킹 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망하게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를 현대사회에 비춰보자. 주식을 한다. 리스크를 테이킹 하면서 계속 매수를 한다. 내가 산 이 회사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는 정확히 100%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럴 거라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 리스크를 떠안는다. 어느덧 내가 투자한 금액이 이백만 달러라 치자. 이 회사가 앞으로 더 성장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일상생활을 한다. 근데 갑자기 불현듯 경제위기가 온다. 코로나 같은 대재앙이 온다. 그리고 주가는 폭락한다. 이 대재앙은 극 중의 안톤시거다. 그는 본인의 자산을 잃은 것에 대해 운명처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보안관 벨처럼 지극히 안정적이고 평온한 기성세대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합당하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격일까.

아니, 그런 대재앙이라는 불확실성 뒤에 더 큰 주가의 상승과, 안전관리시스템의 개선, 전 세계의 경제 호황, 삶은 다시 안정을 불러오고 그의 리스크테이킹은 결국옳은 선택이 됐다. 만약 그때 주식을 팔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우리 삶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쩌면 안톤시거 같은 불확실성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을헷지 하고자 일론머스크가 화성을 간다고 하고, 전기차를 만들고, 환경오염, 기후위기가 개선되고, 인간에게 위험한 상황을 줄이고자 AI시대가 그렇게 도래한다.

100% 완벽하고 평온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이 영화에서 보안관 벨이 가장 불행하고 불완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걸 본인만 모르고 있을지도.

운명을 그대로 믿든, 개척하든 그건 결국 한 개인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 미래가 보장되는 긍정적인 운명이라면 그대로 순응하고 낙천적인 삶을 살아도 무방하나, 반대로 르웰린의 아내처럼 당장 내일 50% 확률로 죽을 수도 있다면? 오늘 어떻게든 그 상황을 대비하고자 발버둥 칠 것. 인간이란 원래 그런 간사한 존재다.위기 앞에서 그대로 순응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거의 없거든.


자, 그러면 우리는 뭘 해야 할까. 변화해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더 빠르게 우리가 그 시대에 적응해서 나 자신도 바뀌어야 한다. 넷플릭스는 처음 DVD를 빌려주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스트리밍 서비스를 할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다. DVD대여업으로도 돈을 이렇게나 잘 버는데 스트리밍 구독 그거 누가 하겠냐며 비웃었다. 지금은?

전 세계 유료구독자수는 최소 5억 명이 넘는다. 과감히 변화와 혁신을 이끈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안톤시거를 두려워할 필요가 이젠 없다. 운명론을 믿든 안 믿든, 내가 언제 죽든 안 죽든 영화의배경 1980년과는 달리 지금은 리스크테이킹을 하지 않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어차피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 뻔하거든. 보안관 벨의 인생은 현대사회에선 평균도 못 건지는 썩 좋은 결말이 아닐지도. 르웰린처럼 리스크 테이킹하면서 수익 가지고 도망만 다니는 게 아니라, 안톤시거를 직접 찾아가 죽인다는 맷집 있는 마인드로 불구덩이에 용감하게 들어갈 때가 아닐까.

극심한 빈부격차, 기후위기, 환경문제, 영토분쟁, 관세전쟁, 국내외 정치적 변수 등 지금이 완벽한 세상이라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건 어쩌면 우리 각자가 그 퍼즐의 조각을 맞추라는 신의 ‘운명’ 일지 모른다. 오히려 다행 아닐까? 내게도 불확실성을 제거할 기회가 있다는 거잖아. 안정만을 따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이제 진짜 없다.


시험에 등록한다.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여행을 간다. 사고 날 수도 있는데.

누구는 편안한 직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 백수 될 수도 있는데.

새로운 걸 배운다. 재미없고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좋아하는 이성에게 고백을 한다. 차일수도 있는데.

내 집마련을 한다, 주식을 한다. 내일 폭락할 수도 있는데.

결혼을 한다. 서로 안 맞을 수도 있는데. 지금 솔로보다 더 불행할 수 있는데.


다 실패할지 모르는데 그냥 다 한다. 왜? 그게 변화의 시작이니까. 그게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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