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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아무도 몰라

영화 <케스트어웨이> 리뷰

by 홍그리

꿈으로만 간직했을 때 더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 꿈이 아니라 만약 그것이 내 노력이 됐든, 우연의 연속이 돼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됐다 한들 그 결괏값에 실망할 수 있거든. 꿈으로 간직했을 당시의 기대심리보다 현실이 못하다면 실망은 둘째 치더라도 삶의 이유자체가사라질 수 있다. 인생에서 본인의 꿈이 전부였던 한 사람에게 그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 길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이어진다는 인사이트를 안긴 주인공 척은 영화가 나온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인에게 값진 깨달음을 준다.


영화 ’케스트 어웨이‘ 는 도망간다는 뜻이다. 본인이 세상에서 도망친게 아니라 세상이 그로부터 도망간거다.세상이 그를 억까해도, 무인도로 홀로 내던져도, 모든 것이 무너져도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자, 근데 생각해보자. 나 스스로 모든 것이 준비돼있고,그 어떤 외적변수를 제거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하더라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나는 내 의지와는 별개로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무인도에 아무도 본인을 찾으러 오지 않은 주인공 척처럼. 산 꼭대기에 올라가 목상을 만들고, 나무와 돌로 SOS 메시지를 만들고불을 피워 본인의 존재를 알린 듯, 그걸 봐주는 아무런 사람도 없다면? 살아나갈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면? 그노력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그의 행동과 문제해결능력에서 끝까지 그 노력을 의미있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얻은 그 삶의 의미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척은 FEDEX 물류회사의 평범한 직원으로 시스템분석가다. 관리자로써 직원에게 늘 엄격한 시간엄수를 강조하고, 사랑하는 아내 캘리와 함께 산다. 어느 날, 비행기사고로 추락해 혼자 외딴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그의 무인도 생존기가 시작된다. 생선을 날로 먹고, 코코넛을 부셔가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을 보장받고자 안간힘을 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척은 불안해한다. 한편, 긴 수색작업 끝에서도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그에겐 페덱스 소포가 몇 개 떠밀려온게 다다. 소포안의 스케이트 보드를 칼로 활용하고, 배구공을 하나뿐인 친구 윌슨으로 삼는다.

이렇게 4년이 흐르고, 그가 있는 무인도에는 부서진 보트 조각이 떠밀려온다. 그의 철저한 계산과 준비 아래 폭풍우가 몰아친 뒤 파도를 헤쳐 마침내 윌슨과 함께 섬을 떠난다. 그런데 아뿔싸. 사랑하는 아내 캘리는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난 그의 존재는 환영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오히려 현재의 삶을 헤치는 방해물로 전락한다. 아내 캘리라는 하나의 희망만 가지고 섬에서 4년을 버텼던 그였기에 삶의 이유를 잃은 듯하다. 아무 길도 없는 사방이 막혀버린 무인도에서 빠져나오니, 도리어 길은 뚫려있는데 정작 본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러니. 영화는 동서남북 끝없는 길을 배경으로 막을 내린다.

근데 그 마지막 엔딩 속의 척의 표정은 희망차다. 본인은 그토록 세상을 필요로 했지만 세상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도 표정이 밝다. 왜냐?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필요로 하는 세상을 내가 직접 찾으면 그만이니까. 또 무인도에 어떤 소포가 내일 떠내려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그냥 근사한 이유 없이도 내일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얻은 것이다.


Who knows what the tide could bring?


‘조류(파도)가 내게 어떤 걸 가져다 줄지 누가 아는가’이 영화의 보석 같은 클라이맥스라 본다. 척은 무인도에서 죽기 직전의 위급상황에서도 마지막 소포하나는 뜯지 않았다. 왜? 여기서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기 위함이겠지. 윌슨이라는 배구공 친구를 임의로 만든 것도, 그에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동반자라는 의미부여를 한 것도 아무도 본인을 찾지 않을 거라는, 모두가 나를 기억에서 지웠을거라는 고독에서 벗어나 꼭 살아 돌아가야 할 원동력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인간은 이렇게나 정과 인연에 약한 동물이다. 살아돌아갔을 때의 친구들과 캘리 등 그의 지인을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사회적 연대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중은 한가지 궁금증이 있다. 왜 그를 처음에 FEDEX 물류회사에서 그토록 시간을 엄수하는 인물로 설정했을까. 삶을 철저히 계획하고 본인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인물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의 노련함과 기교를 부각하기 위해서? 아니, 감독은 그런 인물설정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앞에 완벽한 그조차 단번에 무너져내리는 걸 강조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 위기를 분명하고 명징히 시각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심오한 철학적 물음을 안긴다. 우린 왜 사냐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 돌아왔는데 직장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안 반겨주고, 이런 말못할 고통을 견뎠는데 또 지금 더 큰 고통이 왔는데 어떻게 살아가냐고. 도대체 살아가는 원동력이 뭐냐고 척아.

그 질문에 척은 마지막 엔딩씬에서 웃으며 뭐라고 답했을까.

“내일은 무슨 소포가 내게 올까. 혹시 너 알아? 모르잖아.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떠밀려온 소포와자연을활용해 거친 파도를 넘은 뗏목을 만들었듯, 앞으로 내게 올 어떤 무언가로 또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그게 인생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을까. 척이 힘겹게 넘었던 파도는 힘겨운 삶의 파고를 일컫는 듯하다.


척의 마지막 엔딩씬 갈림길에서 캐나다로 가든,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길을 가든 그 어떤 갈래를 선택하든 그에게 파도는 또 올 것이다. 그것도 아주 거친 파도.

그리고 그 파도를 힘겹게 넘은 끝에 마치 시험이라도 한듯 또 세상은 그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상관있나? 내게 주어진걸로 또 그 역경을 넘어가면 그만이다.

우리 하나쯤 갑자기 사라져도 이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이 시작된다. 뉴스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각자는 크고 먼 우주 속 하나의 점과 같은 존재일 뿐. 근데 척과 우리는 어떤가.

살아가려면 애인도 필요하고, 물도 필요하고 음식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직장도 필요하다. 세상이 소포처럼 그냥 던져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건 내가 가공하고, 노력해 어떻게든 살려고 내가 쟁취한 것들 아닌가.

이 영화에서 윌슨의 역할은 대단하고 웅장하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사회적 존재임을 증명하면서인간의 연약함과 고독함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존재. 윌슨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한 가지 힌트를 남긴다. 원래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자고. 모든 게 다 무너져도,내일은 또 무언가가 내게 떠밀려올지 모르니, 그 재미로 그냥 계속 살아가보자고. 파도도 계속 맞으면 면역이 생기니, 시간이 지나면 무인도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무인도 뿐 아니라 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자의든 타의든. 또 이겨내면 그뿐이지 뭐.

불확실성은 불안을 내포하지만 기대 섞인 무한한 가능성의 의미도 있다. 주인공 척은 대중들에게 마지막 웃음 뒤편에 그걸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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