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리뷰
누군가 계급사회에 대해 익숙해졌다고 한다면 그건 엄연한 사실이며, 꽤나 자연스럽다. 인간은 존재하면서부터 단 한 번도 평등한 적이 없었고, 현대사회에서 평등에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수렵사회에서는 힘이 센 원시인만 본인과 본인 가족을 먹여 살렸고, 이는 자연스레 조선시대와 같은 근대사회에 권력을 가진 왕과 그렇지 않은 백성이 자리하도록 만들었다.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한 권력쟁탈전은 현대의 정치판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본능이 섞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계층을 논할 수 있는 영역은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더 다변화됐다. 단순 권력만이 아니라 본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계층화되고, 그에 맞는 각자의 기준과 이해관계가 속한 집단에서 본인을 평가받는다. 십 대 때에는 입시, 외모, 싸움, 외모 20대에는 취업, 자기 계발, 집안 30대 이후는 자산, 결혼, 부동산, 사회적 위치. 이 모든 것이 더 세분화되어 현대인의 순위를 매긴다.
이 끔찍한 순위경쟁에서 위에 올라선 이들은 그 위치를 본인의 능력과 동일시하는 위험한 착각에 빠지고, 하위 계급에 속한 자들은 높은 계급을 가지지 못한 대다수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붙인다. 이 이유는 성인지감수성일수도, 경제적 결핍, 집안배경 등 일수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본인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서로 배려하고 통합과 화합을 이뤄야겠지만, 사실상 이는 이론상만 아름다운 단어라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상위계층은 본인의 위치를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계층의 사다리를 끊으려 악을 쓰고, 하위계층은 자조적 태도로 피나는 노력과 성취보다 사회구조의 문제로 눈을 돌린다. 영화 <설국열차>는 이 현대사회의 계급을 탐색하는 시선의 전체과정을 꽤 적나라하게 한 열차 안에서 드러낸다.
설국열차는 빙하기로 돌입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상에 남은 생존자들은 기차에 타고 있는 이들밖에 없다. 기차 밖의 풍경은 모든 게 얼어 도저히 생명체라고는 살 수 없어 보인다. 열차의 맨 앞에는 호화로운 식사와, 유흥으로 특권을 누리는 소위 상위계층이, 꼬리칸에는 인간 같지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하위계층이 자리한다.
모든 것이 'ORDER'. 말 그대로 질서와 정돈 안에서 움직이며, 이 열차를 관리하는 우두머리 윌포드는 오로지 질서와 체계적인 시스템만이 모두 다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긴다. 주인공 커터스는 여기서 분노한다.
커터스도 과거엔 상위계층이 시키는 노동을 했지만, 아이가 죽어나고 온갖 착취와 쓰레기 같은 삶 속에서 저항 없이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새로운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하위계층을 데리고 열차를 거슬러 위로 올라간다. 이 열차의 끝은 어디며,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확인시켜주고자 함이다.
이는 현시대 우리 자본주의와 비슷한 결로 대비된다. 열차라는 출발선은 모두 동일하나 열차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면 차별이 존재한다. 커터스는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실제로 도착한 앞칸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한들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생존자만 모인 하나의 열차 안에 한 체제 속에서 모두가 존재하는 것. 혁명? 혁명한들 커터스와 그 무리는 열차 밖에 나갈 수 없다. 밖이 두렵다. 어차피 밖은 추워서 살 수 없기에 죽을 거거든. 그냥 열차 안에서 하는 열차왕놀이 같달까. 단순히 본인이 존재한 위치의 변화지, 존재의 변화가 아닌 것이다.
맨 앞칸에 도착한 커터스와 윌포드가 나누는 대화 전체 의미심장한 내러티브 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다름 아닌 열차 아래에서 키 작은 꼬마가 엔진을 작동하고자 반복노동을 하는 장면이었다. 여기 이 아이를 넣으려고 영화초반 키가 작은 아이들을 윌포드는 데려간 것이다. 키와 몸무게가 딱 맞는 아이를 찾기 위해서.
영화는 단순히 계급사회의 풍자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여겨 이 자본주의의 패착을 재생산하는 인간 스스로의 문제라고 불편한 진실을 꼬집는다. 우리가 개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비교하고, 조롱하고, 혐오하고, 삶에서 중요한 것을 앗아가는 모든 이유 자체가 다 스스로를 부품으로 생각한 패착이라는 것. 누가 더 나은 부품이냐의 싸움이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그 부품은 다시 인간으로 대체되고 우리는 그 인간을 끊임없이 소비한다. 그래놓고 구조, 질서, 시스템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인간을 현혹하고, 우리는 거기에 심취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다 우리가 만든 사회다.
얼마 전 포스코씨앤씨의 산재, SPC의 사고로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고, 장관이 직을 걸고, 포상금을 지급하는 등 국가는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여긴 인간이 모인 집단이 이제야 그 색안경을 끼고 봤던 부품을 다시 진짜 인간으로 봐주겠다는 격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참 우습지 않은가.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을 부품으로 봤던 그 색안경을 여태껏 벗지 못한 것이다. 누가? 우리 모두가.
영화의 엔딩에 눈표범의 눈에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상징성이 숨어있다. 이해하지 못한 자에게 마지막으로또 힌트를 준다. 진짜 삶의 자유란 혁명으로 삶을 바꾼 들, 우두머리 윌포드를 죽이고 본인이 왕이 된들, 그를 설득해 모두가 평등한 삶을 살든, 열차 안이 아니라고. 자유는 결국 열차 밖에 있었다고. 한마디로 다 헛짓거리 했다는 거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 속 모든 사람에게 부품처럼 소비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존재할 것이며,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은 대처하고, 그 도덕성을 탐구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걸 막을 수 있는지 깊은 성찰을 안겨주는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에서는 미키가 끊임없이 복제된다. 현실세계가 아닌 지구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서. 원치 않는 본인이지만 익스펜더블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돼 본인의 육체는 열몇 번이나 프린트된다. 이 괴로운 순환은 마치 설국열차의 순환과 흡사하다. 끔찍하게 싫은 게 다시 재생산되는 것. 다시 돌아오는 것. 단지 미키는 정신이 갇혀도 새로운 몸으로 태어났지만,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물리적으로 좁고 나갈 수 없는 한 인간의 괴로운 감옥이다.
어떤 유토피아든, 그 어떤 가상세계든 고통과 불행을 통해 인간은 개인의 현실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편안함만이 계속되면거기서 또 권태를 느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거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예를 들어볼까?
집에서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본다고 해보자.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한 손엔 수박을 들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다. 얼마나 편한가? 근데 인간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 어떤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공부를 하거나, 취업원서를 쓰거나, 갑자기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거나. 가만히 편안한 것만 쫓지 않는다. 무슨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거기서 또 문제해결을 찾는다.
누워있는 게 제일 편한데 인간은 평생 누워있지 않는다. 앉고, 일어서고, 뛰고, 걷는다.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며 선과 악을 막론하고 어떤 문제를 늘 만들어낸다.
실존주의에서는 삶이 원래 의미가 없다고 믿는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다. 그냥 세상에 아무 목적 없이 내던져진 거라고.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 모니터, 키보드 모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자유의지 없이 그냥 세상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은 살아가면서 그냥 찾는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누군가, "저 다음 달에 태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 경험하면서 삶을 개척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엎어도 보고, 다른 걸 해보기도 하고. 이 환경에 순응할 수도, 반항할 수도, 삶의 의미는 어떻게든 개인이 직접 경험하면서 발견하는 것 아닐까. 정답은 없다. 그렇게 흐르다 보면 무언가 내게 맞는 점 하나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 어두운 전망이 가득한 이 설국열차의 미래모습에서 과연 우리 인간은 어떻게 미래를 대비할수 있고, 어떤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할까. 도덕적 경각심과 동시에 존재 자체의 의미, 그리고 이 존재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매 순간을 맞아야 할지 생각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지막에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불확실한 미래, 어두운 미래가 아주 높은 확률로 자리할 텐데 이 환경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을 바꿔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언가 개척할 것인가. 각자의 선택에 심심한 응원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