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8
2026.02.22 (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장 68절]
믿음은 삶을 던지는 행동이다.
누구를 믿느냐,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끝이 정해진다.
우리는 항상 믿음을 사용한다. 집 밖을 나가서 지하철을 기다림은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온 음식을 의심 없이 먹음도 요리사의 보장된 실력과 위생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결과에 변수가 생겨도 국내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은 바로 접근가능한 사회적 시스템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 여행지에서의 변수에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 국가의 보편성과 상식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 변수를 즐긴다. 그 믿음의 끝에 기대와 다른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마침표와 그 이후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루의 끝, 그 기대가 망가지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맞이할 내일을 믿으며 새로운 기대를 꿈꾼다. 하지만 삶의 끝에서 내일이란 새 도화지는 없다.
일상에서의 믿음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그러나 그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가 가르쳐주는가. 일생 이후의 영생을 위해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누가 알려주는가. 어떻게 살 것이며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같은 질문이고 동일한 문제다.
육신은 죽으면 끝난다. 이 끝은 말 그대로 '끝', 사라지는 것, 오늘이 지났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루다. 인간의 결말이 오직 육신의 죽음으로 본다면 이보다 낙관적인 믿음이 없다. 책임도 없고 감당해야 할 그 어떤 여운과 아쉬움도 없는 끝. 이 믿음 안에서는 인생에서 어설픈 답을 가지고 아둥거리고 바둥거리며 살더라도 길어봤자 백세의 삶, 그 안에서 해결되는 마침표를 선물 받는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다. 여기서 영혼은 심판을 받는다. 심판 이후 영혼은 영원한 천국 또는 영원한 지옥으로 간다. 이게 진짜 문제인 것이다.
영혼의 존재가 비과학적이다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과학은 죽음 이후를 설명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죽음 이후를 관찰할 수도 따라서 데이터를 분석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없음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볼 수 없다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진동하고 있지 않는가. 볼 수 없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듯, 예술과 생각에 반응하는 영혼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파스칼이 천국을 믿은 이유는 확률적으로 계산했을 때, 그 선택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믿고 나서 그 끝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내 맘대로 살지 못한 백 년의 아쉬움이 전부다(심지어 죽음 이후엔 그 아쉬움을 느낄 뇌도 마음도 없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차라리 회색지대인 연옥이 있어서 평생을 후회하는 한숨이라도 쉰다면 낫겠으나 영혼은 극단적인 두 장소 중 한 곳에서 영원히 머물게 된다.
물론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의 문제다. 세상은 사후(死後)가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천국과 지옥이 없어야만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없애버렸다. 그 믿음으로 삶을 자신 마음대로 하려 한다. 그렇다고 죽음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귀를 싸매고 눈을 가린다. 모두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야 그 싸매는 노력을 덜 할 수 있다. 그 믿음을 공유하는 신자가 늘어야만 그리고 믿음의 오류를 언급하는 자들이 없어야만 이 위태한 믿음 위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결과를 자신만 지면 그만인데 교과서와 매체를 통해 공공연한 사실처럼 만드는 행위는 부당하다. 세상은 죽음을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사랑하도록 부추긴다. 영의 것이 아닌 육의 것을 위해 살도록 만든다. 그들의 믿음 속 이 땅에는 영은 없고 육만 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이 있다. 그들의 중심을 보신 주님은 육의 배부름이 아닌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무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주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
이렇게 답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이요 참된 음료라 말씀하셨다. 영생을 주는 양식을 먹으라, 보내신 이를 믿으라 명하신다. 이에 여러 제자들이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영생의 이야기를 하는데 살과 피를 내어주는 자를 믿으라는 것은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셨다. 그 십자가의 양식을 취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이요 은혜다.
이미 밝히 드러난 역사를 받아들임에도 어려움이 있거늘 처음 접한 이들이랴 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믿음으로 초대하신다. 오병이어를 베푸신 참된 구주가 영생을 주시고 그 방법을 알려주셨다면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이러한 때에 필요한 듯하다. 영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 초대 앞에 순수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영의 일에는 그에 합당한 방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방법과 기대와 다르자 많은 제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주님이 열두 제자에게도 가려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믿음을 거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는 승리에 삶을 걸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로마의 압제에 광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는 비참한 삶 가운데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가장 근본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초대하신다. 그가 삶을 던져 우리를 구원하셨다. 던지신 삶을 통해 수많은 인생이 영생을 얻었다. 삶을 던지사 이루신 초대에 삶을 거는 믿음은 매우 합당한 선택이다.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삶의 이유는 명확해진다. 영생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이는 나의 삶을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하신 분을 향한 합당한 반응이다.
영생의 일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믿는 것이다.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고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므로 내 역할은 믿는 것이다. 오늘도 그가 영으로, 믿음으로 초대하신다.
피부로 닿는 삶의 문제가 실존하듯 마음을 주관하는 영의 문제도 분명히 존재한다. 영을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다. 이 땅에 살면서 육의 일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이다. 영의 세계가 진동하면 육의 세계는 영향을 받는다.
그가 나를 오라 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반응했다. 아버지의 일로 초대하셨고 나는 순종으로 동참하였다. 이제 나의 눈을 들어 상황을 뛰어넘으신 주님을 바라보길 원한다. 다 이해할 수 없음이 찬양이고 믿음이다. 가는 여정 가운데 필요한 지혜를 주시기에 믿음의 발걸음을 담대하게 내딛는다. 설령 모두 깨닫지 못하더라도 저 천국에서는 선명하게 밝혀주시기 때문에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일상의 방향을 조절한다. 일상이 모여 만든 일생의 발걸음 끝에 그리스도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맞아주실 것이기에 이 믿음은 참으로 믿을 만하다.
이미 심판을 받았거나 사망에서 건져지거나, 이 땅에서도 회색지대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던지는 믿음의 대상을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그 대상이 내가 아닌 그리스도임을 나는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