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5
2026.02.09 (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불안
건축사 시험을 앞두고 함께 준비하는 이가 불안해할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다. 당신이 매일 손을 움직이고 있다면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실력은 늘기 때문이다.
건축사 시험에 대해서는 스스로 이 작은 공식을 터득했고 실천했고 결과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의 불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어찌할 줄 모르는 바이다.
최근 불안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인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불안은 지위의 상실 또는 추구로 인해 따르는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본문은 사람들이 그 지위를 갈망하는 이유를 그것이 사랑받기 위한 자격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불안의 근본은 사랑받기 위한 자격으로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문제인 듯하다. 세상은 그 믿음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대놓고 돈과 명예라 말한다. 모두가 믿으니 돈과 명예로 거머쥔 지위는 믿는 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없는 자는 잊힌다.
지위에 대한 유혹. 태초부터 이어온 악연이다.
뱀은 하와에게 다가와 물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동산의 모든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였냐고.
뱀은 하와로 창조주가 허락하신 동산의 전체의 선물이 아닌 단 하나의 제약에 집중하게 했다.
하나님과 친밀했던 하와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뱀아 그게 무슨 질문이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게 주신 이 모든 과일을 보아. 얼마나 멋진 선물이니!
너도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렴.
하와는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하와의 입에서는 위와 같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되려 단 하나의 질문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명령 앞에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되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삭였다.
과연 죽지 않았다. 단지 그 순간이 아니었을 뿐, 서늘한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과연 눈이 밝아졌다. 단지 밝아진 눈이 발견한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였다.
즉사하지 않음도, 수치를 가림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되려 했던 여자, 그리고 못 이기는 척 먹었던 아담.
여자를 탓했던 비겁했던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건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럼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거야?'
하와를 이유로 변명했던 아담도 결국 그 지위를 원했다.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의 속삭임, 아니 결국엔 자기 자유의지의 말을 들었다.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 했던 시도는 처참했다.
하나님과 거닐며 동행했지만 그 이면에 교제의 대상과 동등하려는 마음이 존재했던 걸까?
너무나 닮고 싶었던 걸까. 그게 아니어도 사랑받고 사랑하기에 충분했을 텐데.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아담은 무엇을 기대했을까? 눈이 열릴 때, 무엇을 보길 원했을까?
무엇을 기대하였든 결과는 조금도 가깝지 않았다. 이 거짓의 역사는 되풀이되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불안은 잘못된 사랑의 대상, 그리고 잘못된 자격을 추구함에 대한 고통이다. 참된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려 하나 만족이 없다. 타인의 사랑으로 채워보려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 없다. 더욱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 최대한 그 사실을 잊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첫사랑이 있다.
그 은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니고데모의 방문
니고데모는 밤중에 홀로 예수님을 찾아간다. 당신은 과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니고데모의 고백에 예수님은 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로 답하신다.
답을 찾고자 했던 니고데모의 방문에 오히려 수수께끼 같은 충격이 찾아왔지만, 메시아를 구하던 니고데모의 갈급함과 열정에 예수님은 하늘의 비밀과 참된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통로에 대하여 밝혀주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했다. 그를 믿어야만 영생이 있음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며 성경의 요약이자 하나님의 마음, 요한복음 3장 16절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이다. 독생자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영어 본문의 one and only 또는 only begotten으로 표현된 독생자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관계를 드러낸다.
유일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 사랑은 나의 이해를 벗어난다. 가장 친밀한 관계이자 자기 자신이었던 아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것도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심지어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멸망함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우리와 함께 하는 그 기쁨이 더 컸기에.
인자가 광야의 놋뱀처럼 들려야 한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무엇을 연상하였을까.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를 감히 이 예언과 연결 지을 수 있었을까.
왜 십자가여야 했을까. 참으로 잔혹하다. 정녕 그 방법 말곤 없었던 걸까. 수치의 나무에서 쏟으신 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순종의 열매가 있다. 바로 빛의 자녀라 고백하는 나라는 존재다. 이제 그 자녀가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고백한다.
금요기도회
우리의 개척교회는 작년 12월에 설립감사예배를 드렸고 이어서 교회 사업자도 등록되었다. 따라서 이번 연말정산을 위한 기부금 영수증이 발급되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일하심으로 우리 교회의 첫 금요기도회가 시작된 날이었다.
금요기도회가 시작된다는 소식에 대해서 나의 첫 반응은 갈등이었다. 그동안 나는 은혜의 자리를 찾아 내가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했던 금요 예배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접한 뒤 이동하던 지하철 안에서 이 갈등에 대해 묵상했다. 이 예배는 기도와 고심 끝에 세워진 것이며 이제는 나의 교회에 금요일의 기도와 찬양까지 심어야 할 때가 임했음을 깨달았다. 부르심이었고 초대였다.
순종의 마음이 샘솟자 갈등과 근심은 순식간에 기쁨으로 변했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께 전화했고 찬양인도를 하겠다 자원했다. 아버지는 허락하셨고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시작한 우리의 금요기도회에 하나님은 예배자를 보내주셨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했고 당신의 기쁨이 되길 원한다 고백했다.
여전히, 사랑
여전히 새로 등록한 교인은 없다.
여전히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금전적인 부분들에서 자유하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기도한다.
기도는 단 한 줄도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
아들을 내어준 사랑이 충만하게 나를 이끌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여전히 불안해하는 나에게 말한다. 기도하고 있다면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고.
기도가 관계고 은혜의 통로이자 특권이니까.
나를 사랑하는 이를 알고 내가 사랑하는 이를 알기에.
그래서 여전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