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말하기까지

by 홍정교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출근길,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조용히 울렸다. 생일을 알리는 진동이었다. 몇 통의 축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1년에 단 하루뿐인 날이라고들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365일은 각각 단 한 번뿐 아닌가 싶다. 선물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인간관계는 늘 ‘Give & Take’에 가까웠고, 선물은 마음을 나눈다기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1년에 한 번 이렇게라도 연락이 오는 순간만큼은, 마치 내게 남아 있는 관계들을 하나하나 확인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과 나는 아직 괜찮은지, 아직 같은 쪽을 보고 서 있는지. 만약 어느 해, 생일을 깜빡 잊는 날이 온다면 그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남이 되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가정까지 덧붙여 보게 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는 꽤 계산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정말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생일을 달력 한 칸 한 칸에 적어 넣는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만큼이라도 이어진 인연이 고맙다는 표시처럼, 나에게 주어진 작은 관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서툰 몸짓처럼.




작년의 나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바라보며 인간관계의 의미를 곱씹는 하루를 보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속에서 나 역시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보면서.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다. 나는 원래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아니, 다정한 사람이고 싶어서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해왔던 사람이다. 상대의 말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괜찮지 않아 보여도 괜찮은 척하는 마음을 살피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고르기 위해 괜히 문장을 몇 번씩 삼켜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런 노력이 서서히 버거워졌다. 내 다정함이 진심이 아니라 연습된 태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가 가식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점점 차가워졌다. 정확하고, 현실적이고, 불편할 수 있는 말을 택했다. 누군가는 나를 ‘극 T’라고 불렀고, 실제로 나는 F에서 T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편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따뜻한 말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 듣고 싶은 말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아닐 텐데. 누구나 공감과 위로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차가운 현실을 들이밀며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게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해인 작가의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해야 한다.’ 너무 뻔해서 외면해왔던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이 지금의 나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신춘문예 등단 여부나 문학지의 이름으로 작가를 구분하던 사람이었다. SNS를 통해 알려진 작가들, 누구나 알 법한 말을 쓰는 책들, “너는 너대로 소중해” 같은 문장을 지나치게 쉽게 여겼고, 심지어 혐오에 가깝게 밀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폄하하던 방식의 문장들이 이번에는 나를 가장 깊게 흔들었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 잘하고 있다면 애쓰고 있다는 걸 안다면 그대로 말해주는 것. 그 단순한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회피해왔는지를 그제야 마주하게 되었다. 어설픈 위로는 독이 된다는 나의 짧은 확신 아래에서, 위로가 가장 필요했던 친구에게 나는 오히려 더 밀어붙였고, 더 채찍질했고, 그들이 불편해하는 얼굴을 모른 척 지나쳐왔다. 다정함을 버린 것이 솔직함이라고 착각했던 시간들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직 나는 완전히 다정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말 앞에서 망설이고, 차가운 문장이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건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는 것을. 올해의 생일은 작년보다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축하 메시지의 숫자를 세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온도를 느끼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하루가 무너질 듯 흔들릴 때, 정답 대신 다정한 한 문장을 건넬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돌아가 보려 한다. 어쩌면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거창한 위로나 정답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당연했어야 할 말 한마디를 제때 건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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