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생은 실전이다 그래서 내일을 연습할 방법은 1도 없고 늘 실전 속에서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 나의 20대는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취업도 창업도 투자도... 그럼에도 늘 무언가에 도전했다.
처음 20대가 된 순간은 누구나 그렇듯 굉장히 설레고 단어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정이 생긴다. 풋풋한 갓 성인이 되는 나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나의 20살의 시작은 대학교에서 시작했다. 다른 점은 나는 전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점이겠다. 꿈꿔본 적은 없지만 4년대 대학교의 대학교다운 그런 캠퍼스 생활이란 건 나에겐 없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20대에 가장 좋았던 시절은 대학생 때라고 생각이 든다. 재미도 없고 배우는 의미조차 찾지 못한 고등학교 수업에서 벗어나 정말 배우고 싶고 관심 있던 요리 공부를 할 수 있고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대학교 때 수업이 너무 즐거웠다. 늘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과 아이 컨택하며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고 배웠다. 이때 배우는 즐거움 공부하는 즐거움을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닌 관심 있는 것에 집중하는 성격이란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졌다. 졸업 즈음엔 홍콩연수를 통해 전국에 각 요리대학 대표들과 만난 교류도 좋았고 세계를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이건 졸업 후 내 인생 첫 큰 사건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도전하게 한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의 축소판 군대를 다녀왔다. 나는 여전히 군대는 단지 대한민국에 태어나 남자라는 이유로 받는 2년간의 처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같이 불합리와 부조리에 가득 찬 시스템에서 그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은 지옥 그 자체다. 그래도 나름 그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려 훈련소에서도 수료식 때 연대장 표창장을 받고 4박 5일 휴가도 포상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훈련병 때 갑작스럽게 다이어트를 극단적으로 하니 몸상태가 말이 안 되게 망가졌었는데 그 후로 자대 배치를 받고 취사병으로써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
새벽 4시 30 취사장에 들어서니 바닥이 전부 얼어서 깜깜한 취사장의 불빛을 켜려다 그만 뒤로 자빠져버렸는데 이때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다쳤다. 그 후 고통에 의무대대를 전전하며 취사병으로의 임무는 배제되고 나는 한순간 부대 내의 폐급 병사로 전락했다. 나는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욱 힘들었고 썩은 동아줄이라도 매달려보는 방법으로, 양주 국군병원 의무관에게 도저히 군대 내에서 근무가 힘드니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지게 할 수 없냐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매우 차가웠다. 남은 나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니 지옥 같은 군생활에서 나는 인생 처음으로 극단적 절망에 빠지고 우울했고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고 휴가 때 인터넷에 있는 모든 정보를 다 뒤져서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고 그 당시 행보관과 함께 사단본부로 가서 단판을 짓고 나는 의병제대는 못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지게 되었다 일병부터 상병 달 때까지 몇 개월간의 고통과 사투 속에서 나는 방법을 찾고, 그 후 내가 사는 지역 보건소에서 남은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그동안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런 부조리함을 품은 세상 속에서 내가 전역하고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행하는 동안 운명의 책을 만나게 된다 나에게 처음으로 '경제적 자유'라는 단어를 알게 해 준 책이다. 책이름은 '머니트리 시스템' 당시에도 나는 어떻게 하면 돈이라는 문제에서 인생을 해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블로그를 20살에 시작한 것도 돈 벌기 위해서였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태에서 무자본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건 블로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2년간의 인생 최악의 쓴맛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3번 온다 하는데 나는 첫 번째 터닝포인트를 '일본 워킹홀리데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대학교와 군대도 큰 경험이었지만 터닝포인트라고 할만한 경험은 아니었다. 세상에 온전히 나의 힘으로 살아보는 첫 한걸음을 배우고 깨닫게 한 일본 워킹홀리데이 경험이야말로 나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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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완성 글이지만 전에 한번 남겨서 그 뒤를 조금 이어서 적어보자면, 난생처음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 땅에 외국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건 참으로 모험이었다. 별다른 큰 고민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갈망했고 그래서 떠났다. 단돈 7만엔들고 시작한 일본 워킹홀리데이는 아리마 온천마을에 위치한 한 료칸에서 시작하여 오사카에 있는 이자카야를 거쳐 기후현 게로 온천마을에 있는 리조트 호텔에 들어가기까지 약 1년간의 치열한 삶을 살았다. 부모라는 안전망에서 벗어나 온전히 혼자 살아보려 떠난 그 경험은 매우 험난했고 힘들었고 특히 나는 주방일을 했다 보니 굉장히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20대에 가장 잘한 일이라면 이 경험을 꼽을 수 있을듯하다. 나는 굉장히 강해졌고 이보다 힘든 상황은 살면서 많이 겪지 않을 거 같아 어지간한 일들에 면역이 된다. 어쩌면 큰 고통을 20대 초에 빨리 알았기에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피부로 깨달았기에 지금의 생활을 지혜롭게 헤처 가려 할 수 있는듯하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20대 가장 꿀 빨았던(?) 시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창업을 하려 이것저것 알아보며 꿈을 향해 노력했다. 실제로 내가 한국 와서 한 일중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자본 창업 관련 책 8권을 지른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을 인터넷에서 접하고 정부지원사업도 기웃거렸는데 결론은 포기했다. 아마 이때 포기하지 않고 더 물고 늘어져서 진짜 창업을 하기 위해 방법을 찾았다면 지금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쉬운 건 26살도 지금 돌아보면 굉장히 어렸기 때문에 누군가 좀 더 좋은 어드바이스나, 내 의견을 동참해주고 밀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있지만 환경설정과 무모해지지 못한 나의 선택에 누굴 탓하겠는가. 그렇게 창업은 뒤로 밀어놓고 현실적인 대안을 위해서 취업을 했다.
나름 요리 쪽에선 고 스펙인지라 면접도 자신감으로 늘 좋은 결과를 얻었고 이쪽 시장은 사람이 부족해서 다행히(?) 취업은 잘돼서 취업은 했으나 늘 진입장벽 낮은 직업엔 격이 낮은 인간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를 겪기에 어디 가든 오래 일하지 못하고 취업한 곳도 3개월 만에 나왔다. 그 가운데 일을 다니면서 블로그를 꾸준히 했었는데 이 블로그로 수입이 꽤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예 직장을 때려치우고 블로그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면서 아주 쉽게 돈을 벌었다 그것도 꽤 잘 벌었었다. 그러던 2017년 겨울 블로그가 맛탱이가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네이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저품질 블로그'가 돼버렸다. 모든 글이 노출에서 밀리고 새로 발행하는 글도 검색 반영이 안 되었다. 플랫폼이 갑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때 전국에서 갑자기 코인 붐이 일면서 암호화폐 투자를 하고 대출까지 받아서 한끝에 나락을 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허탈했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손에 남은 것은 어머니께 빌린 빚과 허름하고 곰팡이 냄새로 퀴퀴한 5평 남짓 서울 자취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숙제만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위기감을 크게 갖지 못했다. 다행인 건 그대로 아무것도 안하진 않았다. 나는 요리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한 일본 공항지상직! 정말 나하고는 1도 상관없었던 길이었는데 정말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도전했다. 물론 기껏 배운 일본어를 써먹고도 싶었고 일본 생활에 미련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 취업은 거진 it 쪽으로 몰려있다. 때문에 단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취업하기는 여 간힘 든 게 아니다. 반대로 일본어를 좀 못해도 코딩을 좀 하거나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이 가능하다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27살 여름부터 가을까지 국비지원 교육을 통해 일본 오사카 간사이 공항 지상직 하청업체에 취업하여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알선업체와의 트러블과 하청의 하청으로 정처 없이 일을 하게 되어 이건 아닌다 싶어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년 같은 3개월이었다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잃었다.(솔직히 잃은 게 더 큰 거 같다) 막연한 생각으로 도망치듯 간 곳에 낙원은 없었다.
다시 또 요리의 길로 가게 되었다. 역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10년 넘게 해온 요리는 어찌 됐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고 익숙한 것이 편했다. 다만 조금 대우가 좋은 곳을 도전해보려 했다. 그래서 대기업 단체급식 조리사로도 취업해보고 공기업에도 도전해봤다. 결과는 전부 내 상상과 달랐고 결국 요리사는 포기했다. 내 성격으론 도무지 격이 맞지 않고 진입장벽 낮은 직업에 대한 회의감도 매우 컸다. 이젠 뭘 해 먹고살아야 하는 때에 창업을 해보기로 했다 솔직히 반이상은 엄마의 등상과 친구의 꼬드김에 얼떨떨하게 시작했다. 정말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 막연하게 시작했다. 동업을 하면서 약 3달간 고군분투 옥신각신하며 겨우 가게 오픈하고 결국 싸우다 오픈 1달 만에 친구와 동업을 파하고 혼자서 1년여간 동업 친구 빚 갚으며 코로나로 힘든 장사를 어찌어찌 붙들고 나가다 작년 5월 중순에 가게를 닫았다. 그나마 친구 빚은 다 갚았지만 어머니 빚은 더 늘었다. 나이는 계속 늘고 빚도 늘고 열정은 식었다.
작년 투자시장 붐과 함께 나는 암호화폐에 다시 투자수익을 보며 지금까지 투자수익으로 버텨오고 있다. 백수지만 나름 크립토 커런시 트레이더라며 배짱부리면서 디지털 노마드랍시고 블로그와 유튜브를 병행 중이다. 수익은 많지 않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다 생각하며 붙잡고 있다. 20대의 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으니 솔직히 지친 마음도 있지만 배부른 소리인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불성실하며 저질체력이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마음속 깊이 고요하게 자리 잡아 타오르는 분노가 있다. 이 분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투지이며, 인생의 반전을 위해 나아가는 투쟁심이다.
나는 삶을 판타지로 보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현실을 잘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삶은 고통이란 것이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투쟁이고 무언가 쟁취를 하기 위해선 희생과 포기를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내 20대의 수많은 고통과 희생과 포기가 30대에는 드디어 좀 보상받아야겠다는 보상심리와, 이 경험을 거름 삼아 앞으로의 인생을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가 있다. 성공의 정의를 내리자면 원하는 가치를 얻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가치는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해 전진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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