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꼭 필요한가
나는 책 읽기와 음악 듣기를 제외하면 취미랄 게 없는 심심한 사람이다. 뭐 한국에서야 가끔 전시나 공연도 자주 다니고, 친구들이 하는 조기 축구도 나가고, 아이스하키도 나가고, 농구도 보러 가고, 야구도 보러 가고.....이렇게 나열해 보니 은근히 활동적인 인간 같지만, 정작 해외에서 정확히 말해 외국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가 사는 탄자니아의 시골에서는 할 만한 취미가 없다. 할 수 있는 취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여기에 와서 야심 차게 시작한 아침 수영은 아침마다 달라지는 밀물-썰물 시간에 맞춰 나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수영을 생계가 아니라 운동으로 하는 인간은 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스트레칭이라도 할라치면 근처 어부들이 저놈은 왜 저러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고, 아이들은 신기한 장난감을 보듯 구경하며 나를 따라다니며 인사를 건네며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중국인이 수영을 한다?! 거의 동물원에 새로운 원숭이가 들어왔다 정도의 뉴스거리였을 것이다. 몇 번 수영을 나가다가 나는 그 모든 관심과 야유를 한몸에 받으며 차분히 자유영을 할 정도로 과감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나마 하던 아침 러닝은 피곤함과 나이 든 아저씨(라 쓰고 비만이라 읽는다)의 고질병인 무릎 통증으로 인해 두 달 정도 열심히 하다가 포기해버렸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포기한 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나의 무릎은 인간인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뛰지 말고 그냥 걸어라..... 크흠... 나는 그 메시지를 존중했다.
뭐 사실 운동을 떠나서도 요즘 나는 뭐랄까 취미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E북을 비선호하는 나로서는 가져온 실물 책들을 이미 두세 번씩 돌려 읽었고, E북을 읽어보려 노력했으나 눈이 아파서 포기했다. 세상살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타협을 요구하게 되었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삶은 아마 이재용 회장도 못 한다(아마도...). 대부분의 인간은 원하는 것보단 가능한 것 안에서 취미를 조정하며 산다.
암튼 그러다 보니 나는 여기에서 어떤 취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취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취미가 됐다’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 느낌이다. 취미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새 취미 고민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되었고, 그 프로젝트는 매일 아침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또 문제다. 도대체 취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에게 취미는 정말 필요한가?
취미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생각보다 골치가 아프다. 나는 단순히 할 게 없어서 취미를 찾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제를 붙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취미가 없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어떤 결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취미가 없다는 건 단지 시간이 많다는 뜻일 뿐이고, 시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생각이 많아질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바쁠 땐 취미 생각을 안 한다. 한가해질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보이고, 그제야 비어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취미가 필요한 이유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견디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취미가 없는 시간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너무 크게 들린다. 침묵이라는 건 사실 소리보다 훨씬 피곤한 법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무언가를 시작한다. 요가를 하거나, 악기를 배우거나, 동호회를 나가거나, 심지어 취미 고민하기를 취미로 삼기도 한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취미라는 것은 애초에 나라는 인간이 주어진 시간을 견디는 방식일 뿐, 꼭 있어야 하는 필수품은 아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며 시간을 견디고, 어떤 사람은 가만히 앉아 시간을 견딘다. 취미가 있는 사람은 취미로 시간을 채우고, 취미가 없는 사람은 그 빈칸을 그대로 둔다. 물론 빈칸을 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빈칸을 보면 자동으로 불안해진다.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 같고, 비어 있다는 사실이 어떤 실패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빈칸 자체가 의미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빈칸을 경험하는 중이고, 그 경험이 나에게 불편함과 동시에 이상한 자유를 준다.
취미를 만든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꾸미고 싶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취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이고,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면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요리를 취미라고 말하면 생활력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취미는 정체성의 장식품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장식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고 내 정체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장식 없이도 서 있는 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생각해 보면 취미는 정체성을 꾸미는 장식이지, 정체성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지금 꾸밈이 없는 상태의 나와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취미를 억지로 찾으려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으면 억지로 만드는 취미는 곧 의무가 된다. 의무가 된 취미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수영을 다시 시작해 볼까 생각했다가도, 어부 아저씨들과 아이들의 시선을 떠올리면 의욕이 사라진다. 러닝을 다시 해볼까 하면 무릎이 먼저 반대한다. E북을 읽어볼까 하면 눈이 반대한다. 결국 몸과 환경이 지금은 그냥 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취미는 필요할 때 생기는 것이지 필요하지 않을 때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뭐라도 나를 증명하기 위한 취미가 필요했다. 시간을 붙잡아둘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간이 너무 느려서 오히려 취미가 없어도 하루가 넘칠 정도다. 시간이 넘치는 곳에서는 취미가 사치품이 된다. 삶이 너무 꽉 차 있을 때만 취미가 기능을 한다. 지금의 나는 빈칸과 여백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는 취미가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부럽지. 늘 좌우명처럼 말하고 다니지 않나,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고,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나도 취미로 사람을 만나고, 취미로 생활의 활력을 찾는 사람들처럼 나도 뭔가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곳의 환경은 그런 욕구보다 더 큰 침묵을 준다. 이 침묵이 때로는 불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위로가 된다. 취미가 없다는 사실이 내 삶을 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취미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이상한 자립심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취미가 없어도 된다. 언젠가 환경이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고, 무언가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할 때 자연스럽게 취미가 생길 것이다. 취미는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 일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이 공백도 언젠가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취미에 대해 고민하며 글을 쓰는 이 순간 자체가 이미 일종의 취미 아닐까. 나는 취미를 찾는 과정을 취미로 삼아버렸고, 그걸 글로 쓰면서 또 다른 취미를 발견한 것일지도?
결국 오늘도 차를 한 잔 내리며 바람을 보고, 하늘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하루를 채운다. 취미는 없지만, 하루는 어찌 됐든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 지나가는 하루를 조금씩 아주 느리게 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음미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결핍으로 보지 않기로 한다. 오히려 이 느리고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내가 천천히 나 자신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면,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다시 무언가를 배우고 즐기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취미도 따라올 것이다. 지금의 이 공백은 잠시 머무르는 숨 같은 것이고, 숨이 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오늘도 괜히 하늘도 한번 보고, 바다도 한번 보면서 이 작은 생각 하나를 붙잡아 오래 굴려본다.
이런 사소한 움직임들이 언젠가 취미가 되고 또 내 삶의 문장 한 줄이 되겠지.
취미도, 삶도 원래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은근히 도착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