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 싫어하자

어둠의 홍상수 팬

by Josh

요즘 유튜브에서 가장 자주 보고, 가장 애정하는 민음사의 김민경 편집자. 그는 홍상수의 영화를 싫어한다고 하면서 덧붙였다.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서 싫어하자”


나에게 누군가를 혹은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일은 대체로 빠르고 쉽다. 나는 분위기에 끌리고, 몇 장면에 홀리고, 어딘가 나와 닮은 감정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것 전체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싫어하는 일도 쉽다. 소문을 듣고, 태도를 보고, 이름만 들어도 얼굴을 찌푸리며 미리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김민경 편집자는 그 양쪽의 게으름을 동시에 비웃는다. 좋아하더라도 대충 알고 좋아하라는 것, 싫어하더라도 다 알고 싫어하라는 것. 사랑은 무지의 특권일 수 있으나 혐오는 공부의 결과여야 한다는 것. 홍상수의 영화가 대체로 그렇지 않나, 어딘가 찜찜하면서도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는.


홍상수의 영화를 처음 보고 나는 꽤 당황했다. 별일 없는 이야기, 어색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대사, 갑작스러운 줌인과 줌아웃, 술자리, 반복되는 남자들, 비슷비슷한 여자들, 계절이 있는 산책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농담, 그리고 사건이라 부르기 민망한 사건들. 그의 영화에는 극적인 플롯의 쾌감이 거의 없다. 대신 누군가의 말실수, 표정의 주저함, 침묵의 길이, 술이 조금 오른 뒤의 자기연민 같은 것들이 화면을 채운다. 보통의 영화가 서사를 전진시키기 위해 인물을 쓰고 장면을 배치한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인물의 민망함과 비루함이 드러나는 찰나를 붙잡기 위해 서사를 최소화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현실적이다, 날것 이다, 삶의 우스움과 쓸쓸함이 있다 같은 말을 한다. 나 역시 그런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의 영화에는 분명, 꾸며낸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이 서로를 망치는 방식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


문제는 그 가까움이 때로 미학이 아니라 변명이 된다는 점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흔히 사소한 일상의 진실을 포착한다고 칭찬받지만, 그 일상은 묘하게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 있다. 자의식은 넘치되 책임은 지지 않는 남자, 자꾸만 솔직함을 핑계 삼아 타인을 시험하는 남자, 예술이나 자유를 말하면서 결국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는 남자. 그리고 그 곁에는 그 남자의 미숙함을 받아내거나, 관찰하거나, 떠나거나, 혹은 잠시 매혹되었다가 결국 상처 입는 여자들이 있다. 이 구도는 너무 자주 반복된다. 반복은 작가의 세계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 세계의 한계를 폭로하기도 한다. 홍상수의 영화가 어떤 일관된 우주를 이룬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우주가 얼마나 좁은지도 보여준다.


뭐 그의 영화 제목처럼 누군가는 나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말할테지만, 나의 감상은 그렇다. 감상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 않나(오프라인에서 만났떤 홍상수 감독 영화의 팬들은 꽤 무서웠다. 그래서 계속 변명을 하게 되는데..). 아무튼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가 인간의 비루함을 너무 정확하게 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를 서사의 주인공으로 상상하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는 훨씬 더 비겁하고, 반복적이고, 궁색하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단한 악인이 아니라 소위 지질한 사람들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현실적이다. 인간은 대개 거대한 악보다 작은 비겁함으로 타인을 다치게 하니까. 술자리에서 흘리는 한마디, 애매한 농담으로 포장한 모욕, 책임질 마음 없는 호감, 자기연민으로 덧칠된 이기심. 그의 영화는 그런 장면을 잘 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그 비루함을 지나치게 잘 알아버린 나머지 그것을 이미 하나의 스타일로 굳혀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적나라한 관찰처럼 보였던 것이 자꾸 보다 보면 익숙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민망함조차 계산된 리듬이 되고, 실패한 대화조차 고유한 미학이 된다. 삶의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보이는 장면을 반복 생산하는 데 이른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동시에 아주 노련하다. 무심한 척하지만 자기 세계를 어떻게 소비 가능한 감각으로 만들지 정확히 아는 감독의 영화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꾸 걸린다. 너무 잘 만든 허술함은 더 이상 허술하지 않다.


그의 영화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그는 거대한 메시지를 설파하는 감독이 아니고, 시대를 정면으로 재단하는 감독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한 사람의 순간적인 감정과 관계의 흔들림에 카메라를 고정한다. 많은 것이 생략되고, 인물들은 끝내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대단히 현대적인 태도다. 삶은 원래 정리되지 않고, 사람은 원래 일관되지 않으며, 진실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드러난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면서 심지어 그것을 거의 신조처럼 밀고 나간다. 하지만 불완전성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끝내 책임 있는 시선을 갖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모호함은 미덕일 수 있지만, 언제나 미덕인 것은 아니다. 때로 모호함은 판단 유예가 아니라 판단 회피다.


특히 그의 영화를 둘러싼 찬사에는 종종 어떤 지적 허영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많은 것이 일어난다, 사소함 속에 존재의 진실이 있다, 반복 속 차이를 포착한다 같은 말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런 말은 때로 영화를 제대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영화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홍상수를 좋아하는 일은 어느 순간 하나의 교양처럼 소비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는 미묘함, 지나치게 설명하지 않는 태도, 덜 말하고 더 아는 척하는 취향. 그의 영화는 분명 그런 종류의 관객을 부른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김민경 편집자의 말이 더 세게 다가오는 이유일지 모른다. 대충 알고 좋아하는 일은 순진할 수 있지만, 다 알고도 계속 좋아하는 일은 때로 자기기만과 가깝다.


그래서 나는 김민경 편집자의 문장을 홍상수 영화에만이 아니라 모든 취향에 적용해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어떤 대상을 충분히 모르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다 알기도 전에 싫어한다고 선언하는가. 좋아함은 관대하고 싫어함은 엄격해야 한다는 그 역설은 사실 취향보다 태도에 대한 말이다. 세상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반대로 행동한다. 좋아하는 것에는 계속 눈을 감고, 싫어하는 것에는 대충 알면서도 확신한다. 그래서 좋아함은 점점 맹목이 되고, 싫어함은 점점 선동이 된다. 그 문장은 그 편리한 구조를 뒤집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바로 그 시험대 위에 놓이기 좋은 대상이다. 모르고 보면 꽤 좋아할 수 있다. 낯설게 가벼운 형식, 우스꽝스러운 대화, 관계의 미묘한 어긋남, 일상의 공기를 건져 올리는 손놀림. 하지만 조금 더 보다 보면 반복되는 남성성의 구조, 미학으로 정당화되는 자기연민, 비루함을 응시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넘어서는 윤리에는 도달하지 않는 태도가 보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선택해야 한다. 그래도 좋아할 것인가. 아니면, 다 알고서 싫어할 것인가.


나는 아직 그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완전히 싫어한다고 말하기엔 그의 영화가 인간의 어떤 우스운 진실을 너무 정확히 건드린다. 그렇다고 기꺼이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그 정확함이 너무 자주 자기복제와 자기면죄로 흐른다. 아마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불편하게 흥미롭다. 그것은 훌륭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영리하고 비루하며 매혹적이고 진부한 것이 한데 섞여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그리고 그런 모순은 어쩌면 영화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


결국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서 싫어하자”는 말은 취향의 결론이 아니라 감상의 순서에 대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첫눈의 호감은 허락하되, 최종 판단은 유예하라는 것. 사랑에는 약간의 무지를 허용하되, 혐오에는 충분한 숙고를 요구하라는 것. 홍상수의 영화는 그 순서를 통과하기에 좋은 대상이다. 쉽게 좋아할 수 있고, 오래 보면 더 어렵게 남는다. 처음엔 사소한 일상을 찍는 영화 같지만, 자꾸 보다 보면 무엇을 반복해서 보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끝내 바꾸지 않는지, 어떤 세계를 자기 예술의 이름으로 보존하는지가 보인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은 홍상수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아니다. 그를 보면서 내가 어떤 관객인지 드러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불편한 것을 미학이라 부르며 참아주는 사람인가. 반복을 세계관이라 부르며 면죄해주는 사람인가. 혹은 사적인 결함과 예술적 성취를 어디까지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가. 그의 영화는 그 질문들을 피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는 좋은 감독이라기보다, 관객을 시험하는 감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시험 앞에서 나는 김민경 편집자의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대충 알고 좋아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다만 다 알고 난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좋아할 수는 없다. 그때부터 취향은 감상이 아니라 판단이 되고, 그 판단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드러날테니까.


홍상수 좋아하는 친구가 이 글을 읽으면 또 엄청나게 반박하면서 화를 낼 것 같다. 네가 뭘 아냐며..... 크흠


그래 너 말이 다 맞아... 그러니 내 말도 그냥 듣고 웃어 넘겨주라....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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