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를 세는 친구

by Josh

그 애는 누가 봐도 티가 나는 사람이다. 숨기려고 애쓰는데, 숨기려는 몸짓이 더 크게 들켜 버린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시다 남은 커피 위로 김이 올라오는지 아닌지 보다 그 애의 시선이 어디에 꽂히는지가 먼저 보인다. 컵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 빨대를 한 번 굴렸다가 멈추는 손가락,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끄는 속도, 딱 거기까지가 요즘 그 사람의 하루다. 그 애의 하루는 늘 누군가의 손끝에서 시작한다.


“좀 늦었네.”


내가 말을 걸면 그 애는 “어, 잠깐 일이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잠깐의 일은 늘 같은 종류다. 누군가의 말투, 누군가의 표정, 누군가의 눈꺼풀이 내려앉는 각도 같은 것을 관찰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 그 애는 그런 걸 애정에서 비롯한 일이라고 부른다. 애정에서 비롯한 일이라, 쉽게 생각하면 일은 쉬워 보인다. 숫자와 마감과 결재선이 있는 일들은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고, 하고 나면 끝나니까. 그런데 그 애가 하는 일은 끝이 없다. 누군가의 사소함에 혼자 반응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종종 수도에서 만난다. 종종 같은 카페에서 만나 일하고, 종종 같은 택시를 타고, 그렇게 종종 같은 시간을 낭비한다. 그 애의 낭비는 대체로 특정한 사람에게 향한다. 본인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거리만큼 그의 이름은 자주 바뀌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는 바뀌지 않는다. 애초에 바뀌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바뀌는 것에 가깝다. 내게 그 애는 늘 그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는 관찰 카메라 같았다. 녹화 버튼이 항상 눌린 채로 계속 돌아가는 블랙박스 같달까.


너무 많이 들어 질려버린 그 애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애는 그의 말수를 세며 사랑을 계산한다. 오늘은 ‘안녕하세요’를 자기한테 먼저 했다고, 오늘은 먼저 눈을 마주쳤다고, 오늘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뻗어 버튼을 눌러 줬다고. 그 애는 그 작은 조각들을 가만히 모아 한 문장을 만든다. 나는 그 문장이 언제나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완성되는 게 신기했다.


“어제 회의 땐 나 보고 웃었어.”


그 애가 말했다. 나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답했다. 그 애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째려본다. 그 애는 나의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확정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처럼 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확정이 무서워서 가능성만 붙잡고 늘어진다. 확정되면 끝나니까. 가능성이면 계속할 수 있으니까. 그 애는 웃음을 절대로 그냥 웃음으로 두지 않는다. 웃음은 언제나 신호이고, 신호는 해독되어야 한다. 해독된 신호는 희망이어야 한다. 희망이 아니라면 그 애는 다시 해독한다. 다른 각도로, 다른 빛으로, 더 억지스럽게.


나는 그런 그 애를 바라보며 한국에서 배우던 스쿼시를 떠올렸다.


처음 스쿼시를 배웠을 때, 코치는 내게 가장 쉬운 말을 했다. “벽을 보세요.” 그리고 공을 던지듯 치라고 했다. 공이 벽을 맞고 돌아왔다. 나는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허둥지둥했다. 코치는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벽은 배신 안 해요. 항상 돌아와요.” 그 말이 그때는 위로처럼 들렸다. 사람이 아니니까, 기분도 없고 변덕도 없고 잠도 없고, 그냥 맞으면 돌아오는 일만 한다. 거기에는 마음이라는 변수가 없어서 편했다.


스쿼시는 이상한 운동이다. 보통 많은 운동들은 상대가 있어야 연습이 되는데, 이건 상대가 없어도 연습이 된다. 코트 안에는 벽이 네 면이나 있다. 벽은 상대의 역할을 대신해 준다. 내가 공을 잘 치면 벽은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공을 되돌려 준다. 내가 공을 삐뚤게 치면 벽은 내 실수를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 공은 나를 탓하지도 않고, 나를 칭찬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한 만큼만, 내가 준 각도만큼만, 그대로 돌려준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그 애는 사랑을 스쿼시처럼 하고 있었다. 벽을 향해 공을 치고, 벽이 돌아준 공을 답이라고 믿고, 그 답을 들고 다시 공을 친다. 문제는 그 애가 치고 있는 곳이 벽인지 사람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아니,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을 벽처럼 다룰 수만 있다면, 반응의 의미를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 애는 좋아하는 사람의 사소한 것들에 혼자 반응한다. 커피 주문이 늘 아메리카노면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쿨하다고 말한다. 그의 노트북에 스티커가 한 장 붙어 있으면, 어린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며 귀엽다고 말하고, 점심을 혼자 먹으면, 꽤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회식에 늦게 오면 사람들보다 자기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애가 붙이는 의미들은 대개 칭찬에 가까웠다. 사실 그 의미들은 그 애의 욕망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면 내가 좋아해도 된다, 그런 사람이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의미는 늘 그 애의 필요에서 출발했다.


그 애가 혼자 말하듯 말했다.


“어제 내가 메신저로 보내니까, 답장에 마침표를 안 찍더라.”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마침표가 없는데 뭐 어쩌라고? 그 애는 내 표정을 보고 재빨리 덧붙였다.


“원래는 찍거든. 근데 어제는 안 찍었어. 뭔가 내가 편해진 거 아닐까?”


그 애는 마침표 하나를 벽에 부딪힌 공처럼 굴렸다. 툭, 하고. 그리고 그 공이 돌아오는 소리를 혼자 들었다. 나에게 그건 거의 마술처럼 보였다. 없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마술.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쓸데없는 것에 의미 부여하지 마"


그 애는 내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해 보였다. 쓸데없다는 말이 부정이 아니라 애정으로 들리는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너의 쓸데없음을 알아봐 준다는 것, 그것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이 그 애에겐 친밀감처럼 작동하는 듯했다. 그 애는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지”라고 말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 내 귓속에서 오래 울렸다. 나는 그 애의 말속에서, 공이 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혼자 치는 소리. 규칙적인 소리, 피곤해지는 소리, 그래도 멈추지 못하는 소리.


스쿼시 코트에서 혼자 공을 치면, 어느 순간 벽이 상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번엔 잘 받아쳤네 같은 착각이 생긴다. 내가 공을 제대로 쳤다는 확신이 돌아오는 것뿐인데도, 마치 누군가와 호흡이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착각이 연습을 지속하게 한다. 착각 덕분에 실력이 느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착각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애의 착각도, 그 애를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일까.


나는 그 애를 관찰하는 내 자신을 다시 관찰했다. 그 애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그 애의 자리를 너무 쉽게 상상해 봤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나는 그 애처럼 누군가의 마침표를 세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말투를 해독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스티커 한 장으로 성격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는 덜 쓸데없나?


그 질문이 내 안에서 떠오르는 순간에 이상하게도 목이 말랐다. 커피를 마시는데도 갈증은 줄지 않았다. 나는 내 갈증의 정체는 어쩌면 내 안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던 감각 자체가 말라 있기 때문일까.


그 애는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을 향해 마음이 흐른다는 뜻이다. 흐르는 마음은 때로 넘쳐흐르고, 때로 엉뚱한 곳으로 샌다. 그래도 흐른다. 그런데 나는 딱히 흐르지 않는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서 있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감정의 경사면이 없고 물이 흐를 길도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안전해서 아무 일도 없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그 애처럼 사랑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리려 했다. 날짜가 아니라 계절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어깨를 오래 바라본 기억, 누군가의 손등에 난 작은 흉터를 만지며 웃었던 기억, 누군가의 이름을 속으로 여러 번 되뇌던 기억. 그런 기억들은 다 어딘가에 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왜 끝났는지, 끝나고 나는 무엇을 했는지, 이어지지 않았다. 기억은 파편만 남아 있고, 파편들은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건 흔한 일이지만, 사랑하려 했던 나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건 흔하지 않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잊은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잊은 것 같았다. 그건 더 큰 망각이었다.


그 애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화면을 켰다 끄고, 켰다 끄고.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그 애는 울리지 않는 알림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침묵도 신호가 될 수 있다고, 신호는 해독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 애를 움직였다.


나는 그 믿음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어리석음이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벽이 벽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벽은 사람의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아예 공을 던지지 않는다. 던져 봐야 돌아오는 건 내 힘의 반사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면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데,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나. 상대가 없다고 확신해 버린 코트 밖에서 나는 아예 라켓을 놓았다.


그 애가 불쑥 말했다.


“근데 진짜 웃긴 건, 나도 가끔 알거든. 그냥 나 혼자 의미 부여하는 거라는 거.”


그 애가 웃었다. 그 웃음은 약간 자조적이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게 더 놀라웠다. 무너질 이유가 충분한데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 어쩌면 그 애는 어리석은 게 아니라, 단단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왜 계속해?”


내가 물었다. 그 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르겠어. 그냥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면 너무 억울하잖아.”


억울함이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그날 처음 들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볼품없는 감정이지만, 현실의 감정은 대개 그런 식으로 얽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애는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내가 여기에 쏟은 걸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 애는 목적지를 잊고 과정에 매달리는 걸까, 아니면 과정이 없으면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걸까.


나는 스쿼시를 배우던 코트 안에서 벽을 향해 공을 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땀이 흐르고, 숨이 차고, 손목이 아파도 계속. 그때의 나는 벽이 벽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나는 어리석었나, 아니면 어리석어 보일 만큼 살아 있었나.


“너는 어때?” 그 애가 갑자기 물었다.

“너는 마지막으로 누굴 좋아한 게 언제야?”


나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글쎄”라고 말하면 되는 질문인데, 내 입은 그 단어도 쉽게 내놓지 못했다. 글쎄,라는 말은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말처럼 들릴까 봐.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내가 살아 있다는 말처럼 들릴까 봐. 나는 그 말이 두려웠다.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다시 다치기 시작할 것 같아서.


“기억이 잘 안 나.”


나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솔직한 말이었지만, 솔직함은 늘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애정하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 애정했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겐 분명 있었을 텐데,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그 시간들을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애는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너도 그런 사람이었구나’ 같은 안도도,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같은 체념도 아니었다. 그냥, 생각하는 눈이었다. 그 애는 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럼 너는 지금 되게 편하겠다.”


그 말이 칭찬인지 비꼼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편하다는 말은 종종 비극을 감춘다. 편해서 아무 일도 없는 삶은, 아무 일도 없는 만큼 아무 감정도 없다. 감정이 없으면 아프지 않다. 대신 뜨겁지도 않다.


​“편한데, 너무 조용해.”


조용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용함이 괴롭다는 건, 그 조용함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조용함은 편안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함이 편안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끝난 사람이 아니다.


그 애는 내게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메시지도 없고, 알림도 없고, 그저 그 애가 좋아하는 영화배우의 사진만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여기서도 뭔가를 계속 찾아. 바보 같아?”


나는 그 애를 보며 생각했다. 저 애는 벽을 향해 공을 치는 사람이다. 돌아오는 공이 자기 힘의 반사인지, 상대의 의지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도 치는 사람. 구분을 못해서가 아니라, 구분해 버리면 공이 죽어 버릴까 봐 치는 사람.


근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벽이 벽이라는 걸 너무 빨리 확정해 버리는 사람이다. 확정해 버리고 나서, 그 확정이 옳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가는 사람. 공을 치지 않는 사람. 치지 않으면서, 공을 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 누가 더 어리석은지,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 내리지 못할 것이다. 사실 결론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정답이 아니고, 어리석음은 오답이 아니다. 둘 다 움직임의 이름일 뿐이다. 멈춰 있는 사람에게만, 움직이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인다.


카페를 나서며, 그 애는 또 휴대전화를 켰다. 나는 그 애가 화면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래야 그 애가 덜 상처받을 테니까. 동시에 나는 그 애가 화면에서 뭔가를 발견하길 바랐다. 그래야 그 애가 계속 살아 있을 테니까. 이 모순을 품은 채로 걷는 내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모순이 있다는 건 아마도 아직 내가 무언가를 바란다는 뜻일 테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래된 라켓을 떠올렸다. 아마 한국 내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스트링은 느슨해졌을 것이고, 그립 테이프는 끈적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라켓은 라켓이다. 벽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치기만 하면, 공은 돌아올 것이다. 다만 그건 사람의 대답이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떤 이름을 떠올리려 했다.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도 아무 이름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능력일지도 모르니까. 능력은 퇴화할 수 있고, 다시 단련될 수도 있다. 벽을 향해 공을 치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은 조용했다. 알림도 없고, 메시지도 없었다. 그 애라면 여기에서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나는 그 애처럼은 못한다. 다만 나는 아주 작은 어리석음을 하나 시도해 보기로 했다. 연락처 목록을 내려가다가, 오래 보고 싶었던 카카오톡 프로필 하나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사람. 혹은 그냥, 내가 아직 사람에게 공을 던질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람.


나는 여러 문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지웠다.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그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마침표를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 대신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가끔 못다 한 말이 오히려 안 하길 잘한 말이 되는 시간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어떤 마침표는 미완결이 아니라 소박한 열린 결말이기도 하니까.


서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의 차이, 뭐 내일은 나도 어떤 라켓을 꺼내 볼지도 모른다.


벽을 향해 공을 치는 일이 결국 사람을 향한 연습이라면 그 애의 쓸데없음도, 나의 망각도 전부 어떤 연습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