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첫 여행은 시외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두 시간의 여행’이었다. ‘소리두울’이라는 여성듀오의 ‘두시간의 여행’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노래 가사처럼 ‘그냥 웃어보고, 눈물도 조금 나는’ 그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던 1988년 대학 1학년 시기였다. 가수 멤버 중 한 명이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 장필순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여행이란 개념을 생각하기 전, 나에게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갖는 설렘과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내가 돌아갈 곳과 내 가족과 내가 할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나에게 여행이란 특정한 장소를 가보는 것이었던 것 같다. 안 가본 나라, 도시 그리고 남들 다 가보는 유명한 곳을 나도 가보는 것이고, 그곳에서 내가 느끼고, 좋아하고, 행복한 것에 대해서는 어쩌면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산사 여행의 시작은 전적으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 순례’를 읽고 난 다음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우리나라 좋은 곳도 다 안 가보았으면서 세계여행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 '그동안 내가 여행이란 것에 대해 큰 목적 없이 그냥 다니기만 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아직 이른 봄인 2월 중순에 출발해서 열흘간 20곳 정도를 다녔고, 아직도 10곳 정도를 남겨 두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산사 여행을 다니면서 산사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에 작은 기쁨과 행복을 느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고, 나의 여행이 왜 나에게 소중한 추억과 경험이 되는지 지금부터라도 느끼고 알아가고 싶다.
숲길과 계곡을 걷다.
산사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숲길을 걷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자주 찾는 산사는 대부분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산의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가는 길, 일주문에서 사찰의 입구까지 가는 길, 또 사찰 내부에서 작은 암자로 가는 길. 그 길을 따라 작고 큰 계곡이 이어지는 곳이 많다.
나에게 숲길을 걷는 즐거움은 숲길을 걸으면서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고, 또 땅을 밟으며 그 길이 만들어지고 보냈을 세월의 흔적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그 흔적에 남기고 기억하는 행위처럼 나무를 만져보고 말도 건네 본다. ‘참 오랜 세월 이곳에 계셨소’, ‘오늘에야 여기를 지나게 되었네요'
산사의 역사와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다.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산 증인이다.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사찰을 만들고, 조선의 임진왜란과 6.25 전쟁 등을 겪으며 소실되고 재건하고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는 건축물, 불상과 석탑에서 숙연함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계단을 오르며 주위를 둘러본다.
사찰이 아니어도 전통 한옥마을이나 창덕궁이나 경복궁에서 가면 볼 수 있는 것이 돌담이나 돌계단이다. 제주에도 아름다운 돌담이 있다. 하지만 사찰만큼이나 아름다운 돌축대, 돌담, 돌계단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은 드문 것 같다.
내가 돌담과 축대, 계단에 매료되는 이유는 그것이 산사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를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사찰은 돌축대를 쌓고, 마당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다시 돌축대를 쌓고 마당을 만들어서 본당에 이르는 단계를 두었고, 각 공간에는 나무, 석탑, 건축물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공간을 구분하되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각 공간에 들어가는 입구에 돌계단을 두어 오르게 하였는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바로 앞을 바라보고, 또 주위를 바라보게 된다. 앞만 보고 올라야 하는 계단이 아니라 오르면서 보게 되는 주위 경관이 함께 있는 까닭이다.
사람을 느끼다.
부처님 불상이나 암벽에 새겨진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실제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산사 여행을 다니며 본 부처님의 얼굴은 우리가 많이 보고 알고 있는 불상의 얼굴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평범한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시대 사람 얼굴이 아닐까 하는 모습도 마주하게 된다. 그런 부처님 얼굴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부처님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산사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된 것 중에 하나가 사찰 입구에 나무나 돌 장승이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시골 마을 입구에서 보았던 무서운 얼굴의 나무 장승, 전통 한옥마을 입구에서 다양한 모습의 장승만을 보았는데 사찰에도 장승이 있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입구의 경계 표시, 또는 민간신앙의 표식으로만 이해했던 장승이었는데 그 의미를 떠나 자세히 살펴보면 무서운 사천왕(사찰 천왕문에 있는 수호신들)의 모습이 아니라 화가 나 있는 듯한, 때론 익살스러운 표정의 사람 얼굴이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하회탈을 보는 것처럼 장승의 얼굴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있다.
자연과 계절을 느끼다.
내가 산사 여행을 한 시기는 2월 중순.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었지만 그 나름으로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는 봄을 알리고 있는 계곡, 막 꽃봉오리를 드러내고 있는 나무들, 막 피기 시작한 아름다운 매화꽃들. 그 꽃 사이를 오가는 벌들. 산사는 사계절과 사계절로 넘어가고 있는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 어느 때에 오더라도 자연은 그즈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봄이 오고 있다고, 아직은 겨울이 남아 있다고. 산사 여행은 경험하는 것이 사계절 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마음에 드는 곳은 사계절 모두 느껴야 한다.
채 100년도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연은 신이 내린 선물이자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깨닫게 하는 신의 말씀 같은 것이다. 그 자연 속에 사찰이란 것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그 또한 자연과 어울리는 모습이 될 때 그 아름다움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모습에서 부조화를 느끼고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자연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산사 여행에서 좋은 곳은 더없이 좋고, 다시 꼭 오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내가 그것을 못 볼 수도 있겠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가치를 사람들은 결국은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