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6코스 | 성찰
흥환보건소→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포스코→송도해변(해파랑길 16코스, 19km)
포항 흥환보건소 앞에서 해파랑길 16코스의 첫발을 내디뎠을 때, 마음은 작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지도상에 표시된 단순한 선 하나가, 이제는 생생한 풍경과 감정으로 채워질 새로운 추억의 길이 될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흥환간이해수욕장을 지난다. 길을 따라 몇 걸음 가지 않아 바닷바람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소금기 머금은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푸른 파도는 조용히 발밑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물결은 마치 수천 개의 보석 같았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번잡함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자갈길과 모래사장을 번갈아 가며 밟으며 걷는 발걸음은 조금씩 무거워졌지만, 그마저도 바다의 리듬과 섞여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파도 소리와 발소리가 어우러진 이 음악은,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자연의 교향곡이었다.
마산 방조제를 지나자, 시야에 한가득 먹바우라 불리는 검붉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를 향해 묵묵히 서 있는 수호자 같았다. 전설 속 연오랑과 세오녀가 이 바위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아무 말 없이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수백 년을 지켜온 바위,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한없이 작고도 경이롭게 느껴졌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절경, 기암괴석들이 이어지는 해안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장엄하고도 고요했다. 바위와 바다, 그리고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누군가가 오랜 시간 붓끝으로 완성해 낸 예술 작품 같았다. 절벽 아래 부딪히는 파도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갈매기 울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힌디기’에 도착했다. 희고 넓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이름만큼이나 독특하고 인상 깊었다. 흰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 이름은, 실제로 발아래 펼쳐진 흰 돌들과 어우러져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눈향나무가 절벽에 자생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척박한 바위틈에서도 당당히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이어가는 그 강인함이 인상 깊었다. 이어서 폭포바위와 선바우에 이르렀다. 바위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감동스러웠다. 선바우는 과거 벼락을 맞아 모양이 바뀌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자연의 힘 앞에서 모양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바위를 보며 우리 삶도 그처럼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걷다 보니 길가에는 오디가 탐스럽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도착했다. 전설 속 장면이 펼쳐졌을 것 같은 바다 풍경 앞에 서자, 이야기가 마치 현실처럼 느껴졌다. 바다 너머 어딘가로 떠나갔던 두 인물이 바라보았을 하늘과 물결,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이 바다 앞에서 잠시 시간을 잊었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히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임곡항과 임곡 방파제를 지날 즈음, 바다 위로 번지는 햇살이 수면 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도구해수욕장에 다다랐을 때는 잔잔한 파도와 따뜻한 모래가 발끝을 감싸며 평온함을 선사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해병대 훈련장이 보이고, 그 옆에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새겨진 시비가 있었다. 시인의 눈에 비친 포항의 포도밭 풍경이 시인의 시상의 실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시 속에서 청포도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쩌면 지금 이 길을 걷는 나의 마음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형산교를 지나 형산강을 건넌다. 넓게 흐르는 강물과 강변에 피어난 꽃들은, 이 긴 여정의 끝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했다. 잠시 멈춰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하루의 끝자락, 뿌듯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마지막 목적지인 송도해수욕장에 도착하니, 해가 천천히 바다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걸어온 길들을 천천히 되짚어본다. 바위 하나, 바람 한 줄기, 전설 하나에도 마음을 열었던 하루였다.
해파랑길을 걷는다는 건, 단지 풍경을 즐기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 파도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소리는 자신을 바깥세상에서 안으로 데려왔다. 자갈 위에 얹힌 발걸음, 소금기 어린 바람, 파도에 깎인 바위 하나하나가 말없이 속삭인다.
“여기, 오래전부터 우리는 이 자리에 있었다.”
바위는 비바람에 깎이며 그 형태를 바꿨고, 바다는 멈추지 않고 해안을 쓰다듬었다. 변화는 두려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하단 걸 이곳은 보여준다. 그 앞에서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조금 기울었다고, 조금 무뎌졌다고 스스로를 탓했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 모든 것조차 자신을 깎아 다듬은 시간의 일부였음을, 자연은 조용히 말해준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햇살은 바다 위에 찬란하게 부서진다. 그 빛을 따라 다시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걷는 지금, 이 순간이 자기를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