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취미를 찾다

해파랑길 |30코스

by 헨리황

용화레일바이크역→황영조기념공원→궁촌레일바이크역(해파랑길 30코스, 7.1km)


이른 아침,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해파랑길 30코스의 출발점인 장호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마을의 공기에는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 기대와 긴장, 그리고 조금은 막연한 두려움이 한데 뒤섞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런 감정은 바람에 흩어지는 듯 사라졌다. 걸음이 시작되자마자 발밑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달라졌다. 다양한 길이 번갈아 발을 맞이했고, 주변의 풍경은 매 순간 새롭게 다가왔다. 작은 논과 밭이 이어진 농촌 마을을 지나며, 담벼락에 걸린 빨랫감이나 창가에 놓인 화분이 정겹게 느껴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 걷다 보니, 이 길은 사람들의 시간과 이야기가 녹아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깊게 와닿았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 활동이 아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갈무리하는 행위이다. 첫걸음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자신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평소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마주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이 시간은 소중한 명상의 순간이 되었다. 용화마을을 지나고 어느 정도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 말굽재에 접어들자, 풍경과 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숲이 우거진 오르막길이 시작되었고, 걸음은 느려졌으며 다리에 서서히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숨은 점점 가빠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 길을 넘어서야 다음 풍경이 펼쳐질 테니까. 말굽재를 오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다. 왜 이런 길을 걷고 있는 걸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질문 대신 다짐이 자리를 차지했다. '한 걸음만 더.' 그렇게 한 걸음씩 쌓아 올린 의지가 결국 자신를 정상에 데려다주었다. 이 오르막은 삶에서의 ‘도전’을 상징했다. 쉬운 길만이 아닌, 가끔은 고되고 힘든 길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줬다.


말굽재를 내려와 황영조기념공원에 도착했을 때, 그가 걸어온 길이 내 걸음과 겹쳤다. 세계적인 마라토너의 길과 나의 걷는 길은 분명 다르지만,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마음은 통했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전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도전의 언덕을 지나 바다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초곡항에 도착하자 탁 트인 수평선과 함께 파란 바다가 맞이했다. 그 순간, 바닷바람이 온몸을 씻어 내리는 듯했다. 걷느라 쌓인 피로도 바다의 냄새와 파도 소리에 녹아 사라졌다. 초곡항의 어선들이 조용히 물결 위에 떠 있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어부들이 삶을 일구는 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 길은 문암해변까지 이어졌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은 걸을수록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파도는 리듬을 만들고, 햇살은 길 위에 그림자를 수놓았다. 속도를 조금 늦추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지나치기만 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 옆에서 앉아 쉬는 여행객, 바닷가의 작고 소박한 카페.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펼쳐졌다. 걷는다는 것은 풍경을 내 안에 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 길 위에서 체감했다.


길의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궁촌항을 지나며 알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땐 언제쯤 끝이 날까 싶었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궁촌레일바이크역에 도착한 순간, 해파랑길 30코스 완주의 뿌듯함과 함께 묘한 여운이 밀려왔다. 하지만 깨달았다. 이 길은 단지 하나의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걸으며 마주한 감정, 풍경, 그리고 사색의 시간은 단순히 한 코스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녔다. 이 길 위에서 자신과 오롯이 마주했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었다.


인생의 첫 번째 막은 온전히 일에 바쳐졌다. 시간에 쫓기고 목표를 향해 달리며 쉼 없이 바빴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고, 그렇게 한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하지만 50대에 문득 멈춰 선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노는 방법을 모른다.’ 어릴 적에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있었고, 작은 것에 감탄하며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습관은 나를 쉬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면 내 삶이 의미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은 ‘걷기’였다. 처음에는 그저 시간을 보내려는 마음이었다. 그저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벼운 산책을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걸으며 주변을 바라보고, 나무의 색과 바람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념이 정리되었다. 그렇게 하루에 30분을 걷던 것이 어느새 1시간, 2시간으로 늘어났다. 몸은 점점 가벼워졌고,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그리고, 해파랑길을 완주 목표로 걸으면서 멋진 취미를 갖게 된 것이다.


걷기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속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직장에서는 속도를 높이며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걷기에서는 느려도 괜찮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야말로 삶을 온전히 누리는 방법이었다. 둘째, 걷기는 작은 성취감을 준다. 특정한 거리를 정해놓고 걸어 도착하면 마치 하나의 목표를 이룬 듯한 만족감이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뿌듯함도 함께 따라온다. 셋째, 걷기는 건강을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자연 속을 걷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정리된다.


이제 걷기는 인생을 채우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 되었고, 삶을 정리하는 과정이 되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자신이 걷기의 참된 즐거움이다. 인생 후반부도 삶은 계속된다. 그 길을 어떻게 채울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다.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해파랑길 30코스를 걸으며 시작한 변화는 앞으로의 자신을 조금씩 바꿔 놓을 것이다. 다음 길이 어디가 되었든, 다시 걷고 싶다. 이 길처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또 다른 길 위로 계속 걸을 것이다.

황영조 기념공원.jpg 황영조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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