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사 속에서 길을 찾다

해파랑길 46코스 |역사 교훈

by 헨리황

장사항→청간정→천학정→백도항→삼포해변(해파랑길 46코스, 14.7km)


속초 장사항에서 걷기 시작한 아침, 코끝을 찌르는 바람이 생각보다 매서웠다.

늦봄이라지만 해안 바람은 여전히 겨울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를 마주하며 한 걸음씩 내디딘다. 오늘의 여정은 고성 삼포해변까지, 약 14.7km. 파도 소리와 함께 걷는 여정이 시작된다. 장사항을 지나서 도로 위에 새겨진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부터 금강산입니다.” 북한의 상징이 된 금강산, 그 남쪽 끝이 바로 이곳이라니. 순간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땅의 분단은 늘 먼 뉴스 속에 있는 것 같다가도, 이렇게 길 위에서 만나는 순간 가슴 깊이 와닿는다. 경계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 그리고 그 너머에 여전히 숨 쉬고 있을 산과 물, 사람들의 삶이 그려진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건 아직 닿지 못한 시간과 이어지지 못한 마음들일지도 모르겠다.


용촌교를 지나 하일리비치해변에 도착하자 해안가에 설치된 사진 명소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커다란 해마, 고래, 하트 조형물들 사이로 아이들이 뛰놀고 연인들이 사진을 찍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 사진 명소들은 단지 관광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는 장치다. 지나간 역사의 무게만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런 ‘밝은 기록’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봉포항을 지나 천진해변에 이르자, 길게 휘어진 모래사장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치 바다가 붓이 되어 해안을 그려낸 듯한 곡선. 이곳의 이름이 ‘천진(天眞)’, 하늘처럼 맑고 순수하다는 뜻이니 더욱 어울린다. 파도가 이 모래를 몇 세기, 몇천 년 동안 밀고 다듬었을까. 그 시간을 상상하니 내가 걷는 이 땅도, 바다도, 모두 살아 있는 역사처럼 느껴진다. 인간이 세우는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선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기다린다.


천진해변에서 조금 더 걸어 청간정에 이른다.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 하나가 수백 년을 굽어본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이곳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 그 교차점에 청간정은 말없이 서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경계’라는 말을 떠올린다. 오늘 걸어온 길, 그리고 청간정에서 내려다보는 물의 경계는 나누기 위한 선이지만, 또 만남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경계, 민물과 바다의 경계, 과거와 현재의 경계 등 다양한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 모든 교차점 위에서, 우리는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청간정을 지나 아야진항에 이르면 무지개가 걸린 도로가 반겨준다. 아야진은 과거 ‘구암마을’이라 불렸고, 방파제 공사로 사라진 바다거북 바위를 대신해 마을 사람들은 바다거북 조형물을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는 마을에 복을 가져다준 상징이었다고 한다. 한 번 무너졌던 전설이 사람들의 손으로 다시 세워졌다는 사실이 인상 깊다. 우리는 때로 과거를 잃어버리지만,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바다거북 조형물은 관광용 설치물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이자, 공동체가 과거를 어떻게 이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아야진을 지나 다시 해안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천학정에 이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학’이라는 뜻을 품은 이름처럼, 천학정은 산 위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서면 짙은 푸름 속에 포말이 일렁이고, 멀리 떠 있는 고깃배가 한 점처럼 보인다. 이 정자는 강원도의 수많은 정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바다 위에 띄운 생각을 내려놓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천학정은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아주 짧은 쉼표 같았다.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는 말을 이 풍경은 해주고 있었다.


자작도해변과 자작교를 지나 마지막 목적지인 삼포해변에 도착한다. 고운 모래 위에 앉아 바라본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있었다. 길의 끝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고, 나는 긴 여정을 마친 피로함 속에서도 마음 한편이 편안했다. 오늘 하루 걸어온 길 위에는 오래된 전설과 정자, 파도와 모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나며 역사의 한 장면을 걷고, 자연이라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 셈이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경계는 나눔이 아닌 만남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사라진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있고, 멈춤은 또 다른 출발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바닷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나는 다시 길 위에 선다. 해파랑길 15코스의 하루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내 안에 파도처럼 남을 것이다.


역사의 깊이는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첫째, 경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만남의 시작이다. 인간관계에서 벽을 세우기보다 다리를 놓고, 이질적인 것을 조화하려는 노력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둘째, 역사와 전설을 기억하고 이어가기이다. 아야진항의 바다거북 조형물처럼 기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오래된 이야기를 공유하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태도는 사회적 유산을 풍부하게 만든다.

셋째, 자연이 알려주는 인내와 변화이다. 천진해변의 모래사장이 수천 년 동안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다듬어졌듯이, 우리 삶도 순간적인 변화가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진 것이다.

넷째, 멈춤과 재출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천학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인생에서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준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지만, 때로는 잠시 멈추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섯째, 현재를 기록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를 소중히 기록하며 오늘을 의미 있게 살고, 중요한 순간을 남기는 것이 멋진 미래를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46코스.jpg


이전 03화3. 자연의 이야기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