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길에서 만난 특별한 이야기

해파랑길 37코스 | 배려

by 헨리황

안인해변 괘방산 입구→강도초교→정감이숲길→정감이수변공원/굴산사지당간지주→오독떼기전수관(해파랑길 37코스, 15.8km)


안인해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잔뜩 흐려 있었다.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고, 태풍의 간접 영향으로 바닷바람은 마치 분노한 파도처럼 몰아쳤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조건이었지만, 그 덕분인지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사람도, 소리도, 빛도 모두 적당히 눅눅해진 풍경 속에서 나는 오늘 해파랑길 37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이 코스는 강릉의 안쪽, 그러니까 바닷길보다 내륙에 가까운 풍경들을 보여준다. 바다를 떠난 대신 논과 하천, 마을과 산길이 이어지며 전혀 다른 리듬으로 걸음을 이끈다.


출발하자마자 논길 사이를 걷게 된다. 좌측으로는 군선천이 길동무가 되어준다. 천천히 흘러가는 물, 그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의 모습이 정겹다. 어떤 풍경보다도 이 풍경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추석까지 이어지던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공기는 갑자기 가을 냄새를 품고 있었다. 대동2리 마을을 지나면서 마주친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건다.

“이 날씨에 걷는 사람도 있네. 물 조심혀.”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에는 지역 사람들 특유의 정겨움과 걱정이 함께 배어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투는 늘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건 단지 말이 아니라, 풍경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인사 같기 때문이다.


잠시 후, 군선천 안인보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아이스하버식 어도가 설치되어 있다. 물이 흐르는 중간에 높게 만들어진 계단 같은 구조물. 연어와 은어, 황어 같은 물고기들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이 어도를 보고 있자니, 사람의 길과 물고기의 길이 겹치는 것만 같았다. 우리도 각자의 ‘어도’를 따라 흘러가지 않던가. 때로는 물살에 밀려 내려가고, 또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며 삶이라는 강을 지나간다. 이 작은 구조물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통로’이고, ‘타협’이고, ‘희망’이다.


강동초등학교를 지나면서 초등학교의 추억이 떠오르며 웃음이 났다. 학교를 지나, 모전리 마을회관을 지날 때, 비를 피하려 잠시 처마 밑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 길을 걷는 또 다른 여행자 한 분을 만났다.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반갑다. 길 위에서는 누구든 친구가 된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그 짧은 만남이 왠지 오랫동안 남을 것 같았다.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정감이 마을 등산로’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좌측 산길로 접어든다. 이 길은 비가 와서 더 조심스럽고, 나무들 사이로 흙냄새와 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용히 걷다 보면 어느새 동막저수지 옆을 지난다. 비가 조금 잦아든 저수지 옆, 그 고요함이 참 좋았다. 물이 고여 있다는 건, 세상 어느 것도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는 증거 같다. 어딘가 서낭당 쉼터도 지났지만, 비로 인해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대신, 나무 아래 잠시 앉아 간식을 먹으며 숨을 돌렸다. 빗속에서도 푸른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고,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은 마치 진주처럼 빛났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굴산사 당간지주를 만난다. 신라 문성왕 13년, 그러니까 851년에 세워졌던 사찰, 굴산사의 흔적이다. 당간지주는 불교 의식을 알리는 깃발을 걸던 기둥 받침돌이다. 지금은 깃발도, 사찰도 사라지고, 이 두 개의 석조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돌 두 개가 주는 감동은 크다.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이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같다. 사라진 것들이 모두 끝이 아니라는 걸, 이 돌은 말해준다. 굴산사의 흔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역사는 항상 거창한 기념비 속에 있지 않다. 이처럼 작은 돌 하나에도, 수백 년을 넘어선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오독떼기전수관이다. 해파랑길을 걷느라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관장님의 작은 배려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내 샤워장을 무료로 개방해 주셨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뜨끈한 물이 피부를 감싸며 피로를 씻어낸다. 몸에 쌓였던 하루의 무게가 가볍게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것은 땀만이 아니라, 하루 동안 마주했던 바람, 파도,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일지도 모른다. 샤워를 마치고 문을 나서며 문득 떠올린다.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늘 화려한 풍경이나 웅장한 구조물이 아니라, 이렇게 작지만 깊이 스며드는 따뜻함이 아닐까. 관장님의 배려가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작은 쉼표가 되었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길은 끝났지만, 마음속에 남은 온기는 여전히 따뜻하다.


길을 걷는다는 건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풍경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다. 해파랑길 37코스는 바다를 떠나 내륙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 안에서 나는 바람과 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흘러가는 물속에 자신을 비추며, 오래된 돌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 길은 늘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주고, 또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한마디 인사, 빗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누군가의 뒷모습, 걷는 사람을 위한 배려, 그 모든 것이 오늘의 여정을 더 아름답고 깊게 만들어줬다. 또 다른 코스를 기다리며, 이 하루를 마음속에 고이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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