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설악과 바다가 함께하는 길

해파랑길 44코스 |미래

by 헨리황

수산항 → 낙산사 → 정암해변 → 속초 해맞이공원(해파랑길 44코스, 13km)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바다를 감싸며 은빛 물결을 만들어내는 순간, 강원도 양양의 수산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쌀쌀한 겨울 내음이 물씬 풍긴다.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바다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폐 깊숙이 들어오고, 염분 섞인 공기가 온몸을 깨우는 듯했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바다는 늘 그렇듯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해파랑길의 빨간 이정표를 따라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긴 길 위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누구를 만나게 될까. 걸음마다 설렘이 묻어났다. 마음을 씻고 자연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정이다.


이 길은 바다와 설악이 어우러진 길이다. 수산항을 뒤로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 오른편으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왼편으로는 눈 덮인 설악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푸른빛과 하얀빛이 어우러진 풍경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설악의 봉우리는 겨울 햇살 아래에서도 여전히 장엄했고, 파도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해안을 두드리며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걷다 보면 조용한 어촌 마을을 지나게 된다. 삶의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곳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늦췄다. 작은 배들이 물 위에 가만히 떠 있고, 어부들은 그물을 손질하거나 조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촌의 일상은 단순하고 느리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깊이는 절대 얕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산대교가 가까워지자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걷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은 모자를 날려 보낼 듯했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지 않으면 한 걸음조차 내딛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바람 덕분에 하늘은 더욱 투명하게 드러나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살은 생동감을 더했다. 낙산대교 위에서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 뚜렷하게 보였다. 바닷물과 강물이 어우러지며 다양한 색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물고기 떼가 움직이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자연이 그려내는 이색적인 풍경은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도시에서 빠르고 날카로운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흐름이 이곳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낙산도립공원에 들어서면,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진다. 이곳은 영화 「강원도의 힘」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이 떠오르며, 그 장면들을 겹치게 하며 걸었다. 영화의 배경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자, 시간의 흐름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곧이어 낙산사에 도착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한 이 사찰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해풍이 살갗을 스치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발밑을 적신다. 지금 바닷가에 자리한 사찰, 낙산사에 서 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를 지켜온 이곳은, 그 존재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어느새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의상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절집의 오래된 기와와 단청 사이로 흘러드는 바닷바람이 낯설지 않다. 이곳은 신앙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사색의 장소이기도 하다. 세속의 소음과 거리 두고 걸음을 옮기다 보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도 하나둘 조용히 정리된다. 해수관음상을 지나 바다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그 너머로 이어지는 하늘은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 무엇 하나 다툼도 없이,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 앞에서 내 안의 분주함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문득 깨닫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해야 할 일’ 속에 파묻혀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판단과 비교, 욕심과 후회 속에 자신을 괴롭혔던가.


마음은 늘 바쁘게 흘러가면서도,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귀를 닫고 살았다. 이 조용한 사찰 마당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마음속 먼지를 하나하나 털어내는 기분이 든다. 무언가를 애써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것의 평온함을 배운다. 산중에 있는 사찰과는 또 다른, 바다와 맞닿은 이곳만의 품이 그렇다. 바다는 그 자체로 커다란 스승이 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법을 말없이 가르쳐준다. 이곳은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게 하고, 다가올 시간을 묻도록 하는 자리.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이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평화의 공간이다. 천천히 의상대를 뒤로하고 길을 걷는다. 발밑의 모래와 자갈이 사각사각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 한켠에 조용히 다짐한다. 앞으로의 시간은 조금 더 비워내며 살겠노라고. 더 바라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겠노라고. 낙산사의 파도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 소리는 어쩌면, 내 안의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낙산사를 출구 쪽에는 "낙산배" 시조목이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킨 나무는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있다면 꼭 듣고 싶었다.


낙산사를 나와 근처의 "본가" 식당에 들렀다. 오래 걷고 난 후에 먹는 해물뚝배기 한 그릇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조개, 홍합, 새우, 낙지 등 바다의 진미가 한 그릇에 담겨 있었고, 얼큰하면서도 깊은 국물 맛이 속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한 숟갈을 뜨며 눈을 감자, 설악산 정상에 흩날리던 눈발이 떠올랐다. 겨울 바다를 걷는 여정의 의미가 그 국물 속에 담긴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을 때, 하늘은 맑았지만 갑작스럽게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햇빛 아래 내리는 눈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낯설고 아름다웠다. 이 모든 날씨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강한 바람에 우산을 펼칠 수도 없었고, 그냥 그 눈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치 바다 위를 건너는 듯한, 커다란 무지개. 그 아름다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자연이 만들어준 이 선물 같은 풍경 속에서 깊게 숨을 쉬며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길은 정암해변으로 이어졌다. 몽돌이 깔린 해변은 걷기에 조금 불편했지만, 파도에 밀려 굴러다니는 자갈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둥글고 매끈한 자갈들은 오랜 시간 파도와 맞서며 만들어진 자연의 조각품 같았다. 모래사장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정암해변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목적지인 속초 해맞이공원에 도착했다. 길고 긴 여정의 끝에서 바라본 속초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깊었다. 해맞이공원 전망대에 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바다와 설악, 고요한 어촌과 역사 깊은 사찰, 그리고 바람과 눈, 무지개까지. 5시간 동안의 여정 속에 담긴 자연의 풍경과 감정의 흐름은 쉽게 말로 옮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삶의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며


낙산배의 시조목이 인상에 남는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다. 작은 물방울이 점차 모여 개울물이 되고, 마침내 하나의 흐름을 이루듯이. 시작은 한 방울의 물과 같지만, 그것이 조용한 수면을 흔들고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삶도 그러했다. 처음 도전할 때의 두려움과 설렘, 과정 속에서의 좌절과 기쁨. 그렇게 쌓여온 모든 시작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왔다. 때로는 실패로 끝나고, 때로는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처음’이 가진 힘이 있었다. 이제 인생이막을 마주하고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어느덧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 깊숙이 알고 있다. 이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무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삶이 일과 가정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길을 걸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어떤 씨앗을 심어야 할까? 오랜 시간 마음속에 자리했지만 돌보지 못했던 꿈과 감정, 그리고 호기심. 그중 무엇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다시 흙 위에 심을 것인가.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한 걸음이 중요하다. 글을 쓰는 일, 길을 걷는 일,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 삶이 가르쳐 준 한 가지 진리는, 모든 시작은 결국 열매를 맺는다는 것.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그려볼 기회다. 어떤 길로 나아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작은 씨앗을 손에 쥐고 있다. 작지만 단단한 가능성을 품고, 다시 길을 떠난다. 비록 거친 바람과 파도를 마주할지라도, 그 끝에 피어날 결실은 분명 아름답고 탐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인생을 향한,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시작이다.

낙산사.jpg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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