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양화 속을 거닐다

해파랑길 32코스 |풍경속의 사색

by 헨리황

맹방해변 → 죽서루 → 장미공원 → 삼척항 → 추암해변(해파랑길 32코스, 22.9Km)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된 날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걷는 날엔 맑은 하늘이 제격이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그런 고정관념이 걸음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비 오는 날엔 비 오는 날의 풍경이 있고, 그만의 여운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비옷을 챙겨 맹방해변으로 향했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펼치고 첫걸음을 내디딘다. 우산살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해변, 회색 하늘 아래 차분해진 파도. 해는 없지만, 세상은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로 옆 담장에는 눈에 띄는 보랏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순비기나무’였다. 보라색 작은 꽃들이 어두운 날씨 속에서도 선명했다. 꽃들은 빗방울을 머금고 있었고,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청초했다. 마치 물속에서 자란 것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비를 피하듯 콘크리트 원형관 안에 웅크린 염소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축 늘어뜨렸지만, 눈빛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처지의 동지라도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녀석에게 괜히 말을 걸어볼까 하다, 조용히 웃고는 다시 길을 걷는다. 비가 오니 나무잎도 더 푸르다. 잎사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반짝이며 마치 초록색 유리구슬 같았다.


한재, 그리고 오십천변을 따라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한재’를 넘는다. 고갯길에는 자전거 종주 인증 스탬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인증소다. 빗속의 동해가 언뜻언뜻 보인다. 평소보다 잿빛이지만, 그 속에 고요한 기품이 있었다. 흰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순간마다, 바다는 자신만의 호흡을 말없이 들려주는 듯했다. 참깨밭이 펼쳐지고, 오분동 마을회관 근처를 지난다. 길가에는 강아지풀이 고개를 숙이고 줄지어 서 있었다. 빗물에 젖은 강아지풀들은 서로 몸을 기댄 채 마치 속삭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땅에 가까이 있는 풀과 먼 하늘 사이에 내가 있었다. 걷는 동안 그런 작고 조용한 것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윽고 ‘삼척교’가 보인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을 따라 걷는다. 천변을 따라 펼쳐진 풍경은 도시와 자연이 나란히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죽서루에 닿기 직전, 삼척문화예술회관 앞을 지나친다. 입구에는 ‘삼척동자’ 조형물이 서 있었다. 귀엽고도 조금은 낯선 얼굴. 어쩌면 삼척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죽서루와 장미공원


다리를 건너 삼척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이라는 말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부터가 운치 있다.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세운 누각이라는 뜻처럼, 입구부터 사각사각 대나무잎이 비를 타고 있었다. 고려시대 후반, 12세기 말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이 누각은 오랜 세월 동안 삼척의 정신과 풍경을 함께 품어왔다. 비가 처마 끝을 따라 물방울로 흘러내리고, 앞뜰의 히말라야시다나무는 거대한 부채처럼 잎을 넓게 펼치고 서 있었다. 수령이 100년이 넘는다고 한다. 진경산수화를 떠올리게 하는 위치와 구조, 그리고 수많은 문인들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는 기록은, 죽서루를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풍류의 상징’으로 만들어주었다.


죽서루는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운 장소였다. 시간을 잠시 잊고 싶은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주었고,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고픈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마루 위로 올라섰다. 비는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누각의 처마는 그 빗소리를 깊게 받아들였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오십천이 휘돌아 흐르고, 저 멀리 흐릿한 산등성이가 보인다. 모든 것이 젖어 있었지만, 그 젖음이 세상을 더 단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흙내음, 풀내음, 빗소리, 나무가 비에 적셔지는 냄새. 감각 하나하나가 되살아났다.


이 자리에 앉아 시를 짓던 묵객들이 떠오른다. 그들도 나처럼 이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을 잊었겠지. 비에 젖은 풍경 속에서, 지나간 세월이 다시 피어난다. 한 줄 시를 떠올리고, 이름 모를 선비들의 글씨가 바람을 따라 흐르는 듯하다. 내가 쓰지 않은 시가 내 마음속에 써지는 기이한 순간이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진 못하더라도, 그 감상만은 나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서루의 마루에 앉아 있으니, 내가 동양화의 한 귀퉁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먹색으로 번져가는 산수, 수묵으로 그린 나무와 계곡, 그 안에 작은 인물 하나인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은 느려지고, 세상은 조용해진다. 바람 한 줄기, 대숲을 흔들고, 빗방울이 처마 끝에 매달렸다가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 너머를 잠깐이나마 엿보고 있었다. 죽서루는 그 문을 살짝 열어주는 장소였다. 바람과 시, 비와 마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곳이다. 비 내리는 날, 죽서루의 마루에 앉아 있었던 그 시간은, 아마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풍경 속의 풍경’이 될 것이다.


죽서루를 나와 맞은편 장미공원으로 향한다. 장미들은 장대비에도 꿋꿋했다. 붉고, 노랗고, 하얀 장미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장미는 화려한 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묵묵한 꽃 같았다. 빗속에서도 지지 않고 피어있는 꽃들,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사람 하나. 그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멀리 삼표시멘트 공장이 우람하게 서 있다. 2023년 기준, 연 매출 8천억 원이 넘는 기업이다. 수십 년간 지역 경제의 중심이 되어온 산업의 상징 같은 존재다. 공장 너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회색과 파랑이 교차하는 풍경이다.


삼척항에서 이사부로드로


삼척 시내를 지나 삼척항에 닿는다. 항구에는 여전히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해풍이 코끝을 찌른다. ‘이사부광장’을 지나면 ‘이사부사자바위’가 보인다.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사자를 이용해 심리전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이곳에 살아 있다. 바위 위에 얹힌 사자상은 무거운 구름 아래에서도 당당하다. 그리고 이사부광장에서부터 이어지는 길은 ‘이사부로드’라 불린다. 길의 이름이 주는 힘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와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름이 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기억을 걷는 일’이기도 하다.


추암해변에 닿다


이사부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비치조각공원’이 나온다. 바닷가에 설치된 조형물들이 저마다 비에 젖어 무겁게 앉아 있었다. 예술은 늘 가만히 있는 듯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오늘 이 조각들은 유난히 고요해 보였다.


작은후진해변을 지나고, 삼척해수욕장에 이른다. 이곳은 이미 해수욕장 개장 준비가 한창이다. 마침 해변 한편에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젖은 모래 위, 작은 무대, 그리고 우산을 쓴 관객들. 비 속의 음악은 잊지 못할 장면이 되었다. 솔비치 콘도를 지나면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추암해변이다. 주변에는 식당들이 있고, 사람들이 제법 많다.


마침내 ‘추암촛대바위’ 앞에 선다. 바위는 바다 위에 오롯이 솟아 있었다. 우뚝 솟은 그 바위가 수천 년 동안 파도와 바람을 이겨낸 끝에 지금의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애국가에 나오는 그 장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오후지만, 이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상상해 본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떠오르는 해, 바위에 부딪혀 반짝이는 파도. 이 장면은 한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 같았다. 문득 50대 이후의 인생을 떠올린다. 촛대바위처럼 굳건하게 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젊은 날에는 파도처럼 거칠게 움직이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바위처럼, 세월을 품고 묵묵히 견디며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는 삶이란 무엇일까.


일출을 생각하며 깨닫는다. 해는 매일 떠오르지만, 그 모습은 날마다 다르다. 인생도 그러하다. 같은 나날처럼 보여도, 매 순간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촛대바위처럼 나 역시 세월 속에서 변하면서도,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바위 위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웅장하고 멋진 삶은 특별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낀다.

죽서루.jpg 죽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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