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연의 신비 속을 여행하다

해파랑길 35코스 |시간

by 헨리황


한국여성수련원→금진해변→금진항→심곡항→정동심곡 부채길→정동진(해파랑길 35코스, 9.7Km)


뜨거운 여름날 아침, 나는 강릉의 한국여성수련원 입구에 섰다. 해파랑길 35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손에 쥔 해파랑길 패스포트에 도장을 꾹 눌러 찍는 순간, 익숙한 다짐의 물결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는 오롯이 길 위에서 보내자고, 발끝으로 자연의 살아있는 호흡을 느끼고 눈으로는 수백만 년의 시간의 결을 따라가자고. 이 작은 의식은 매번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처음부터 길은 솔향기로 가득했다.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벌써 이글거리기 시작했지만, 숲이 드리운 그늘은 아직 아침의 서늘함을 머금고 있었다. 숲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없이 나를 환영했고,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어 대답하는 듯했다. 걸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도시의 번잡함은 저 멀리 사라지는 듯했다. 때때로 갈라진 하늘 틈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는 마치 나를 토닥이는 듯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숲의 평화로운 기운 속에서 잃어버렸던 나 자신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듯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지만, 숲이 선사하는 상쾌함이 그 불쾌함을 지워냈다.


기온은 점점 오르더니, 금세 33도를 넘겼다. 땀이 이마를 타고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땀이 내가 이 길 위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바닷가 근처에 다다르자, 짭조름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마치 바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반갑게 맞아주는 것처럼 시원하고 상쾌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곧 눈앞에 펼쳐질 푸른 풍경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금진해변이 시야에 들어오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선명한 색채의 대비가 압도적이었다. 그 위에 뜨거운 여름 햇살이 금빛으로 물들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남아 있는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현실의 시간은 멀어지고 걷는 이의 기억만이 짙어진다. 도로 한쪽에는 책 모양으로 만들어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먼 옛날 수로부인 설화가 소개되어 있었다. 전설은 오래전 일이지만, 바다는 그것을 기억하는 듯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그 이야기 위를 흐르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걷는 동안 설화 속 여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금진항을 지나 심곡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항구의 풍경은 늘 묘한 정적이 감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어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마치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고요함이 그곳을 감쌌다. 등대는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었고, 부서지는 햇살 속에 고깃배들이 일렬로 정박해 있었다. 항구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여기가 늘 '기다림'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만선의 기대를 안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태우고 떠나는 배를 배웅하며, 그 모든 시간을 품고 있는 장소이다. 항구의 고요함 속에서 잠시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숲과 산을 따라 걷는 조금 더 가파른 길, 다른 하나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바닷길. 잠시 고민했지만, 태양 아래 지친 몸은 자연스레 시원한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정동심곡바다부채길이다. 이곳은 입장료가 있다. 입장료는 5,000원이다.

이곳에서 편도로 끝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안내한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숨이 탁 트이는 경이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부채길은 200-250만 년 전의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이다. 수백만 년 전, 거대한 지각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흔적을 지금 내 두 발이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절벽은 웅장했고, 그 아래로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반짝이며 끝없이 펼쳐졌다. 바다와 맞닿은 아슬아슬한 절벽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사람은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지만 동시에 자연과 하나가 되는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파도 소리가 절벽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웅장한 교향곡은 나의 발걸음을 더욱 경쾌하게 만들었다.


중간쯤 도달하자, 신비로운 부채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그대로,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부채를 펼쳐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흔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연이 그려낸 선과 면이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사진으로 담기엔 부족하고, 기억으로만 담기엔 아까운 절경이었다. 그 곁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위, 투구바위가 굳건히 서 있었다. 마치 용맹한 전사가 바다를 지키고 있는 듯한 형상. 수많은 태풍과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이 바위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용기를 상징하는 기념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자연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바위들 앞에서 나는 자연의 위대함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길은 계속해서 바다를 따라 이어졌다. 해안 길이라 평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르내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절벽과 바다가 가까워지는 만큼, 안전을 위한 튼튼한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위로도 푸른 바다는 쉬지 않고 넘실댔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했지만, 이 경이로운 풍경을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정동진항에 도착했다. 바다를 향해 우뚝 솟아있는 시간박물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리로 된 벽면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옆엔 거대한 해시계가 묵묵히 서 있었다. 시간을 보는 도구이지만, 어쩐지 그 존재 자체가 시간을 생각하게 만드는 조형물이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흐른다. 오늘 하루, 이 길 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정동진 모래시계공원에서 산책한다. 1999년, 새천년을 기념하며 설치된 이 거대한 모래시계는 한 해가 걸려야 모래가 다 내려간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지만, 그 흐름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마치 멈춰 있는 듯한 모래가 한 알, 한 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여정이 나에게 흘려보낸 시간만큼이나 소중한 무언가를 채워준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가 모두 이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소중히 쌓여갔다.


모래시계의 도시에서 시간을 마주하다


정동진역에 도착한다. 정동진역.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잔잔해지는 곳이다. 정동진역은 동해를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기차역이다. 실제로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이력이 있다. 선로의 한쪽은 바로 동해의 해안선과 맞닿아 있어, 마치 기차가 바다 위를 달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많은 길 중에서도, 기차가 함께 달리는 이 풍경은 특별하다.


정동진 역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오래된 시계, 기념사진, 추억을 남긴 엽서들. 그 하나하나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를 말해준다. 여느 역처럼 바쁘게 스쳐 가는 풍경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벽에 걸린 사진 속에는 옛날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장면도 있고, 누군가가 이곳에서 맞이한 새해 첫 일출을 담은 사진도 있다.


역 앞의 플랫폼에 섰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철길 너머로 바로 이어지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를 감싸고 있는 하늘. 기차가 없는 시간에는 이곳이 마치 바다 전망대처럼 느껴진다.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거나, 철길 위에 잠시 멈춰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바다 위를 부유하는 햇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면, 그리고 멀리 보이는 어선 하나. 그 모든 풍경이 정동진이라는 이름 아래 차분히 정리된다.


정동진은 한때 ‘모래시계의 도시’로 불렸다. 1995년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드라마 속 배경이었던 정동진역은, 이후 수많은 연인과 여행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철길 옆을 걷는 연인의 모습, 사진을 찍는 가족들, 새벽 기차를 타고 도착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각자의 사연과 시간을 이 작은 역이 품어왔다. 정동진역은 그런 곳이다. 시간을 잊게 만들고, 시간을 생각하게 하고, 결국엔 나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곳이다.

투구바위.jpg 투구바위


이전 09화9. 햇살과 파도 사이를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