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8코스 : 지킴의 미학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깊숙한 곳, 금평로 117번지. 이곳에는 강릉학산 오독떼기 전수관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제5호로 지정된 이곳은 오랜 세월을 거쳐내려 온 논매는 소리, ‘오독떼기’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되는 오독떼기 소리는 강릉 학산 마을의 논밭에서 울려 퍼졌다. 오독떼기에 대한 의미로는 다섯 번을 꺾어 부르기 때문에 오독떼기라고 했다는 설과 '오'는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뜻에서, '독떼기'는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 등이 있다.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키워주었던 이 민요는 삶 그 자체였다. 오독떼기전수관은 과거의 소리가 현재에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땀과 노력, 그리고 삶의 애환이 담긴 오독떼기의 울림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침의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오독떼기전수관을 출발했다. 몇 걸음 지나자, 서낭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때 ‘굴산사’가 자리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수행자들이 머물던 시간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했다. 강릉 굴산사지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터로, 신라 문성왕 13년(851년)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곳이다. 이곳은 한국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로서, 고려 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길은 천천히 농촌 마을로 이어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마을이었다. 시골집 담장 너머로 피어난 장미와 채송화가 반겨주는 듯했고, 고요한 들판에는 민들레가 환하게 피어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노란 꽃잎은 연약해 보이면서도 단단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이 작은 것들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은 도시의 분주한 속에서 잊고 지낸 감각을 다시 깨워주었다.
마을을 지나자,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다. 나무뿌리가 튀어나온 오솔길을 오르며, 처음에는 힘들게 느껴졌지만, 어느새 내 발걸음은 숲과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바람에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사각거림이 음악처럼 다가왔다. 숲의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조용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현저수지에 도착했다.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호수 표면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저수지 둘레를 걷다 보니, 낚싯대를 드리운 이가 한가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는 그 모습에선 삶을 대하는 태도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호수뷰 다리를 건너자 낡은 농가 하나가 새롭게 리모델링되고 있었다. 기존의 집에 세련된 창이 달리고, 정원은 새 단장을 마친 듯 보였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전통을 지키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느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가옥을 바라보며, 나 역시 삶에서 어떤 것들을 지키고, 또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다시 산길로 접어들며 주변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만이 동행이었다.
산길을 한참 오르자, 모산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산봉은 강릉시에 있는 작은 산으로, 해발 104m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강릉의 자연을 만끽하며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모산봉 정상에서는 강릉 시내와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가을철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산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한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정상에 서자 그 모든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뿌듯함과 고요함이 마음을 채웠다.
내려오는 길에는 신발 먼지떨이기와 깔끔한 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이 있다. 잠시 숨을 돌리며 쉬어갈 수 있는 이 작은 배려가 참 고마웠다. 여정 중 만나는 쉼표 같은 공간이다. 곧 단오공원에 도착했다. 이어서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이 나타났다.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문화 행사다.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를 보존하고 전승하며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된 교육 및 문화 예술 시설이다.
창포 다리를 건너며 본격적으로 강릉 시내로 들어섰다. 골목 곳곳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걷는 즐거움을 더했다. 오래된 담장에 핀 예술의 꽃들이 도시의 역사를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릉대도호부를 한 바퀴 돌며 조선 시대 관아의 구조와 흔적을 천천히 살폈다. 지금은 시민의 공간이 되었지만, 그 안에 스며든 옛 시간이 공간을 더 깊게 만들고 있었다. 강릉 중앙시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 상인들의 외침이 한데 어우러졌다. 시장 특유의 활기와 온기가 나를 반갑게 감쌌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사람과 삶이 오가며 만들어진 따뜻한 에너지가 있었다.
시장 옆 월화거리로 접어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걷기 좋은 산책로가 이어졌고, 커피와 음악, 작은 상점들이 이어졌다. 월하교를 지나 월화정에 도착하자, 고즈넉한 정자의 분위기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강릉 월하정은 강릉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는 의미 있는 정자이다. 강릉 월화거리와 관련된 신라시대 설화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하정(月花亭)은 신라시대 '무월랑'과 '연화부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무월랑'의 '월(月)'자와 '연화부인'의 '화(花)'자를 합쳐 지어진 이름이다. 이 설화는 강릉 월화거리의 테마가 되기도 한다. 도심 속에서도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순간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감사했다.
월화정을 지나 터널을 통과하며 다시 길 위로 나섰다. 걷는 길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아쉬움이 깃든 느낌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마을을 지나고, 다시 숲길로 접어들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경쾌했다. 길이 끝날 무렵, 넓은 들녘이 펼쳐졌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다시 보니 새로웠다.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과 논을 스치는 바람, 그 속에서 나는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솔바람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며, 여정의 끝을 조용히 축복해 주는 듯했다.
지켜냄의 미학: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삶의 여정
삶이란 어쩌면 지켜냄과 개척의 연속이다. 거대한 문명의 흐름 속에서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나, 개인의 작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하며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를 묵묵히 지켜내고 전승하듯, 우리 또한 무형의 가치와 경험을 보존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강릉단오제 안에 담긴 공동체의 정신과 의례, 그리고 오랜 풍습을 후대에 온전히 전달하려는 노력 덕분에 이 전통은 살아 숨 쉰다. 이는 과거의 지혜를 발판 삼아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월하정(月花亭)을 품고 살아간다. 강릉 남대천 변에 서서 오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월하정처럼, 지나온 시간 속에도 수많은 흔적과 기억이 새겨져 있다. 기쁨의 환호성, 힘든 날의 눈물, 때로는 후회스러운 선택의 그림자까지—이 모든 것이 나를 만든 소중한 흔적이다. 어릴 적 서툴게 써 내려간 일기장, 낡은 사진첩 속 빛바랜 미소, 혹은 누군가에게 건넨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모여 자신만의 고유한 전통을 이룬다.
이 흔적들을 외면하지 않고 소중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존중하는 첫걸음이다. 과거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공의 기억에서 용기를 얻으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긍정하는 것. 마치 월하정이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다시 세워져 강릉의 상징이 되었듯, 우리의 삶도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 지켜냄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미래를 개척한다. 전통을 아는 사람이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듯, 자신의 지나온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은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 되어주고, 때로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튼튼한 돛이 되어준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을 탐색하며, 때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로 걷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방식일 것이다. 결국, 전통을 지키는 공동체의 노력이나 개인의 삶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과거를 존중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이 지켜냄과 개척의 조화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개척해 나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