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0코스 : 행복 찾기
강릉 사천진해변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겨울의 길목에서 이른 아침의 공기는 생각보다 선선했고, 백사장을 스치는 바람은 바다의 짠 향기를 실어 나르며 후각을 먼저 깨웠다. 하늘은 푸르게 열려 있었고, 해는 수평선 위로 한 뼘쯤 떠올라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발아래 고운 모래알은 서늘하게 느껴졌고, 발끝에 닿는 파도는 살짝 따가울 만큼 차가웠다.
걷기의 시작은 언제나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뒤섞인다. 특히 바다를 따라 걷는 길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자연과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초입의 길은 정돈된 데크와 자갈길이 교차했고, 그 옆으로 펼쳐진 바다는 잔잔한 파도와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모래사장을 밟기도 하고, 낮은 방파제 옆 오솔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인도했고, 곳곳에 마련된 벤치와 전망대는 쉬어가기 좋은 곳이었다. 길은 곧 방향을 틀어 소나무 숲으로 접어들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이곳은 연곡솔향기캠핑장 근처였다. 도로의 소음도, 바다의 파도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칠 때마다 숲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윙윙 울렸고, 그 틈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더욱 고요함을 돋보이게 했다.
두터운 솔잎이 깔린 바닥은 폭신한 감촉을 전해주었다. 어떤 구간에서는 마치 카펫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사각사각 마찰음이 청각을 간질였다. 숲은 그늘이 많아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았지만,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향긋했다. 젖은 흙과 솔잎이 섞인 향기는 도시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냄새였다. 숲 속에는 가족 단위 캠퍼들이 천천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텐트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바닷소리와 솔향을 맡으며 눈을 뜨는 기분은 얼마나 특별할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숲을 빠져나오자, 시야가 다시 트였고, 길은 영진교 방향으로 이어졌다. 다리 위에 올라서자, 발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색다르게 보였다. 민물인 연곡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두 물줄기가 만나는 그곳에는 뚜렷한 색의 경계가 존재했다. 강물은 맑고 연한 청록빛이었고, 바다는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두 색이 나란히 흐르다 점차 섞이는 모습은 마치 수채화가 번지는 듯했다. 영진교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서로 다른 환경의 두 세계가 어울리는 지점이다.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흐르는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수많은 변화와 만남과도 닮아 있었다.
영진교를 지나 산길을 짧게 오르내리자, 드디어 영진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 실물로 마주하니 생각보다 더 작고 소박했다. 방파제는 하나의 사진 명소가 되어 있었고, 빨간 목도리와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는 커플들이 많았다. 나 역시 방파제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등대, 그리고 파도를 맞으며 마주했던 드라마 속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성과 추억을 남긴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주문진 아들바위 공원에 도착한다. 독특한 바위 지형과 전설이 깃든 명소이다. 이곳의 대표적인 바위인 아들바위는 예로부터 자식을 원하는 부부들이 기도를 드리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노부부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아들을 얻었다고 하여 ‘아들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문진 등대를 지난다. 강릉 주문진항 끝자락에 자리한 주문진 등대는 1918년부터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온 역사 깊은 곳이다. 바닷바람과 파도의 숨소리를 들으며 등대로 향하는 길은, 바다를 품고 있는 이곳만의 고요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등대에 다다르면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지고, 저 멀리 수평선과 정박한 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면에는 바다에서 사고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명패가 걸려 있어 등대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주문진해변에 도착했다. 잔잔한 파도가 해변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서핑 보드를 들고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디디니, 부드러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은 특별했다.
지금 현재를 즐겨라
바다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간다. 파도는 과거를 끌고 오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 밀려오고 부서지며 존재한다. 해파랑길 40코스를 걸으며 바다를 따라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머리 위로 흘러가는 바람, 발아래 부서지는 모래. 이 모든 것이 ‘지금’을 말하고 있었다. 처음 발을 디딜 때는 걸음마다 생각이 많았다. 앞으로 걸어야 할 거리, 남은 시간, 지나온 길.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계산이 무의미해졌다. 바람은 예고 없이 불었고, 파도는 일정한 리듬 없이 움직였다. 자연은 그 어떤 계획도 없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연곡솔향기캠핑장 근처를 지날 때,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들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그 찰나의 움직임 속에서 나는 ‘현재’만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지나간 바람을 붙잡을 수 없고, 다가올 바람을 예측할 수 없다. 오직 그 순간 불어오는 바람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영진교 위에서 두 물줄기가 만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는 그 순간, 둘은 더 이상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색을 띠던 두 흐름이 조화롭게 섞여 들었다. 과거와 미래를 따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 흘러가는 물처럼 나도 그대로 흐르고 싶었다.
해파랑길 40코스를 걸으며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놓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바다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오늘의 바람은 오늘만 불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만 밀려온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온전히 살아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현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