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문학이 들려주는 이야기

해파랑길 39코스 : 글의 온기

by 헨리황

솔바람다리-허균·허난설헌기념관-경포대-사천진해변공원(해파랑길 39코스, 15.8km)


솔바람다리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바닷물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했다. 어촌의 적막함 속에서 해는 수평선 위로 천천히 떠올랐고, 붉은빛으로 물든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신선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걷기 좋은 시간, 길은 부드럽게 열렸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강릉 커피 거리에 들어섰다. 콧속을 간지럽히는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 왔다. 도시는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향기는 먼저 깨어나 사람들을 맞이하는 듯했다. 마침 이곳에서는 ‘강릉커피축제’가 한창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따뜻한 커피를 나누는 손길,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무대, 그리고 커피 한 잔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미소가 가득했다.


강릉 커피거리의‘에티오피아’ 커피 행사장 앞에서는 커피 시음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시음 잔에 담긴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받아 들었다. 커피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며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대자, 부드럽고 깊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깊은 위로와 평온함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이 거리에서, 커피 한 잔이 이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활기 넘치는 커피 거리를 뒤로하고 송정해변을 지나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그 이름처럼, 이 길은 ‘솔향힐링해변길’이라 불릴 만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바람이 불면 솔잎들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가 마음을 다독였다. 숲 속을 걷는다는 것은, 내 안의 복잡한 생각과 소음을 가라앉히고 오직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에 안기는 듯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문해변에 다다르자, 수평선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밀려오는 파도와 부드러운 백사장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다리 아래에는 독특한 형태의 ‘진또배기 소원 성취 조형물’이 서 있었다. 동전을 던져 원 안에 들어가면 액운을 막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동전을 꺼내 들었다. 마음속으로 작은 소원을 담아 던진 동전은 조용히 둥그런 원 안에 안착했다. 어쩐지 오늘 하루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경포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 한 점에도 물결이 일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호수 수면 위로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경포호는 조선 시대 문인이자 천재 시인인 허난설헌의 고향이기도 하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그녀와 오빠 허균의 흔적이 담긴 조형물과 기념 공원이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에 들어섰다.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은 조선 중기 문인 남매인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아름다운 한옥과 솔숲이 어우러진 문학 테마 공원이다. ‘홍길동전’을 지은 개혁가 허균과 시대를 앞서간 문장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허난설헌의 시들이 새겨진 판들이 고즈넉하게 놓여 있었다. 경포호를 끼고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과 허난설헌 기념관으로 발길이 닿는다. 이곳은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가족의 깊은 문학적 유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기념관은 목조 한식 기와집 형태의 단층 건물로,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입구에서부터 발걸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현대적인 건축물과는 다른, 전통 한옥의 단아함이 오히려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돕는 듯했다. 마치 그녀가 살았던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구를 지나서 주 전시실과 소전시실로 향한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억압받던 시대 속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시대를 초월한 열망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당시 여성이 사회활동은 물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작품을 발표하기조차 어려웠던 현실을 떠올리니, 그녀의 삶이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전시실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의 시대상과 그 속에서 피어난 그녀의 섬세한 문학적 감성을 깊이 생각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제약 속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준다. 개인적인 아픔과 고뇌를 시로 승화시켰던 그녀의 작품들은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인 감동을 선사했다. 이 공간은 허난설헌의 삶과 작품을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과도 같았다. 기념관을 나서는 길, 허난설헌이 남긴 문학적 유산뿐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 했던 한 인간의 강인한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시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연구되는 이유를 이 작은 기념관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길은 다시 이어졌다. 드디어 경포해변에 도착했다. 드넓은 바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 저 멀리 정박한 어선들이 어우러졌다. 이곳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한반도 횡단 울트라마라톤’의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매년 9월, 강화를 출발해 강릉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환희의 순간을 맞이한다. 나는 비록 달리지 않았지만, 오늘 이 길을 걸으며 그들이 느꼈을 감동과 성취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근진해변을 지나 사천해변으로 향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억새들이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그러던 중 작은 쉼터에 다다랐다. 뜻밖에도, 70대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그는 인근 베이커리카페에서 구입한 빵을 건네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쉬었다 가요." 그 짧은 한마디가 마음 깊이 와닿았다. 나는 조심스레 받아 든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낯선 길에서 느낀 작은 친절이 가슴속까지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마침내 사천진해변에 도착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며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걸음은 멈추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15.8km를 걸으며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솔향을 들이마시고, 커피 향 가득한 거리에서 사람들의 온정을 느끼며, 문학의 흔적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시간을 넘어 다가오는 문학의 온기


문학은 시간을 초월한다. 한 권의 책이 수백 년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단순한 활자 너머에서 작가의 손길과 숨결을 느낀다. 오래된 문장이 오늘의 우리를 위로하고, 과거의 사상이 지금의 길을 밝혀주는 순간, 우리는 글이 가진 온기를 깨닫는다. 어느 날, 낡은 책을 펼쳤다. 손때 묻은 페이지가 조용히 속삭인다. “나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정갈한 문장 사이사이에는 작가의 고민과 사유가 흐른다. 우리는 그의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글을 통해 그가 본 세상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허난설헌의 시 앞에서 잠시 멈춘다. 그녀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꿈을 품고, 자신의 세계를 글 속에 담았다. 우리는 그녀의 글에서 억눌렸던 감정을, 해방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며 함께 숨을 고른다. 그녀의 문장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억압받던 자들의 문장으로 살아남았다. 예전의 작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기록하는 문학의 힘이다. 우리가 그들의 글을 읽는 순간, 그들은 먼 곳에서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긴다. 누군가 남긴 문장은 또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며, 우리의 삶과 연결되고 있다. 거기에서, 시간을 넘어 건네오는 온기를 느낀다.


38코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jpg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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