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조용한 길 위의 이야기

해파랑길 24코스 ▏마음속 충전소 하나

by 헨리황

기성터미널 → 대풍헌 → 월송정 → 울진대게 유래비 → 후포 (해파랑길 24코스, 18.4km)


기성버스 정류장에 내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바다 내음이 희미하게 실려 온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오늘 걸을 길은 기성터미널에서 시작해 후포항까지 이어지는 18.4km의 여정이다. 평범한 하루가, 이 길 위에서는 특별해진다.


도심을 벗어난 발길이 처음 향한 곳은 구산항 대풍헌(待風軒)이다. 조선 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파견되던 ‘수토사(搜討使)’들이 머물렀던 관청이다. 수토사들은 울릉도로 도망친 죄인들을 수색하고, 일본 어민들의 불법 어로를 단속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작은 포구에서 그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다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하다.


대풍헌 앞에는 독도 형상물이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선조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향해 정기적으로 항해하던 최단 거리의 포구, 이 구산항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당시엔 위성 항법도 지도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험난한 동해를 건넜을까. 선조들의 항해술과 결단력에 경외감을 느낀다. 조용한 바다 위로 흘러가는 마음 한 조각,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시 걷다 도착한 곳은 구산해수욕장이다. 갯벌과 모래가 고운 해변, 송림이 우거진 완만한 해변 풍경이 한없이 평화롭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드물고, 바람 속에는 솔향이 가득하다.


길은 다시 솔숲으로 향한다. 소나무 숲길은 마치 수묵화 속을 걷는 기분이다.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점점이 떨어지고, 발밑에서는 솔잎이 바삭거리며 반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일상을 이곳에 내려놓고,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속도를 줄인다. 마치 시간이 나를 따라 걷고 있는 듯하다. 그 숲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절경은 월송정(月松亭)이다. 관동팔경의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승지다. ‘달과 어울리는 솔숲’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유달리 고요하고 운치 있다. 신라의 네 화랑이 달빛 아래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전설도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고려 충숙왕 때 건립되어 조선 연산군 시절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에 의해 건물이 철거되고 소나무 수천 그루가 베어졌다는 아픈 역사를 지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1956년 시방관리소의 도움으로 해송 1만 5천 그루를 다시 심고, 1980년대에 정자를 복원하여 오늘의 명승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저 다행이고 고맙다. 바람에 흔들리는 솔향 속에서 묵객들이 남긴 시조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다.


이제 길은 다시 바닷가로 향하고, 울진해상 낚시공원이 지나간다. 바위 위에 선 낚시꾼들의 모습은, 오래된 수묵화에서 튀어나온 듯 정겹고 소박하다. 그러다 마주한 것은 울진 대게 유래비이다. 울진 사람들의 삶과 전통이 새겨진 살아 있는 역사다. 높이 솟은 대게 조형물과 그 옆의 어부, 배의 형상은 마치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느껴진다. 고려시대부터 울진 앞바다에서 대게가 잡혔다는 사실은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같은 고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곳 평해읍 거일리는 대게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류가 교차하고 수심 깊은 왕돌초 주변은 수백 종 해양 생물의 보고이자 대게의 낙원이었다. ‘대나무처럼 곧다.’ 하여 이름 붙은 대게, 그리고 '게알을 닮은 지형'에서 유래된 ‘거일리’라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이곳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을 이름 하나에도 바다의 숨결이 녹아 있었고, 사람들의 삶이 스며 있었다.


걷고 또 걸어 등기산 공원에 올랐다. 해가 기울 무렵이라,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녹아드는 모습이 황홀하다. 공원은 세계 각국의 유명한 등대를 한자리에 모은 등대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공원 깊숙이 들어서면 각국의 등대 미니어처가 줄지어 서 있다. 이집트 파로스, 프랑스 코르두안, 독일 브레머하펜, 그리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인천의 팔미도 등대까지. 시간과 공간, 국경을 초월한 ‘빛의 기념비’들을 만나며, 마음속에 작은 등불이 하나씩 켜진다.


정상에 도착하면 후포등대가 굳건히 서 있다. 1968년 처음 불을 밝힌 이래로 쉼 없이 바다를 비춰온 등대. 높지는 않지만, 사람의 길을 안내하는 따뜻한 등불처럼 느껴진다. 공원 한편에는 신석기 유적관도 자리하고 있다. 돌도끼와 뼈, 선사인들의 생활 흔적이 이 작은 언덕에서 발견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수천 년의 시간이 이곳에 켜켜이 쌓여, 오늘의 나와 맞닿은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 후포항에 닿는다. 하루의 열기가 사그라지는 늦은 오후, 바다는 금빛으로 빛난다. 어선들은 하나둘 항구로 돌아오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바다 위를 맴돈다. 낯익은 풍경이지만, 다시 만난 후포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익숙했고, 노을은 따뜻했다.


마음속 충전소 하나


사는 게 참 버겁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바삐 움직였을 뿐인데, 아무것도 이룬 것 같지 않고,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 때. 그럴 땐 나는 ‘배터리’를 꺼낸다. 어디선가 내게 조용히 말을 걸고, 아무 말 없이도 위로가 되는 무언가를 본다.


나만의 배터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습관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배터리는 바닷가를 걷는 일이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발밑의 모래가 부드럽게 밀려올 때, 나는 세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으면, 마음속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된다. 마치 마음의 먼지가 바닷바람에 씻겨나가는 듯하다.


어떤 날은 먼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벤치에 앉는 일이 배터리가 된다. 거기 앉아 있으면 흘러가는 구름도, 잠시 부는 바람도 모두 나를 감싸안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이, “조금 쉬었다 가도 괜찮아,” 하고 속삭여 주는 것처럼 삶의 용기를 준다.


또 어떤 날은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가 배터리가 된다. 별다른 대화 없이도 이어지는 공감, 웃음, 그저 “그랬구나” 한마디에 마음이 고요해진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순간,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대풍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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