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문무왕과 함께 천년의 숨결을 따라 걷다

해파랑길 11코스 ▏느리게 걷는 이의 미학

by 헨리황

나아해변 → 문무왕릉 → 이견대 → 전촌항 → 감포항 (해파랑길 11코스, 17.2km)


해파랑길 11코스의 시작점인 나아해변에 섰다. 잔잔한 파도가 발끝을 적시며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고, 탁 트인 수평선 너머로 오늘의 여정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만 아쉽게도 나아해변에서 봉길리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도보 길이 끊기고 차량 전용 터널이 가로막고 있어 부득이하게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곧 눈앞에 펼쳐질 동해의 장쾌한 풍경과 역사적인 유적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여전히 설렘으로 가득했다.

봉길대왕암해변에 도착하자, 이내 저 멀리 바다 위에 우뚝 솟은 문무대왕릉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 한가운데, 네 개의 웅장한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 그곳은 신라 제30대 왕이자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해중왕릉이다.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음에도, 그곳은 바다와 하늘 사이에 외롭게 서 있으면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문무왕은 평생 전쟁과 정치에 몸을 던졌던 왕이었지만, 죽어서조차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품은 인물이었다. “나는 죽어 용이 되어 동해에서 나라를 지키리라”라는 그의 유언은 아들 신문왕에 의해 실현되었고, 그렇게 문무왕은 바다의 수호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북이 형상의 바위 아래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전해지는 이곳에 서 있으니, 신라인의 정신과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바다의 깊은 숨결과 맞닿은 이 왕릉은 세계에서 유일한 해중 왕릉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더욱 빛난다.


대왕암을 바라보다 문득 인근의 감은사지가 떠올랐다.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를 기리며 세운 사찰로, 그 금당 아래에는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 수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 왕릉, 절이 한데 어우러진 신라의 역사 공간은 자연과 인간, 신성과 실재가 교차하는 특별한 성역으로 다가왔다. 문무왕의 꿈은 정치적 통일에 머무르지 않았고, 자연 속에 자신의 존재를 녹여낸 영원한 수호의 상징이었다.


이견대에 들러 바다를 바라보며 왕과 아들이 주고받았을 그 상상의 대화를 떠올렸다.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 안쪽에서 이견대 위에 선 신문왕에게 조언을 전했다는 전설은 역사 속 인물에 신비로움을 더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했다.


역사에 감탄하며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대본항은 한적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로 맞아주었다. 어촌 특유의 잔잔한 풍경 속에서 정박한 작은 배들과 마을 어르신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인상 깊었다. 특히 항구 옆에 자리한 가곡제당과 그 앞의 ‘할배·할매 소나무’는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함께 살아온 존재처럼 느껴졌다. 비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킨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보였다.


해안을 따라 가곡항으로 이어지는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바다,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리고 바닷바람의 상쾌함이 오감을 자극했다. 이 길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았고, 음악이 없어도 풍요로웠다. 자연이 건네는 언어 없는 위로가 걸음마다 스며들었다.


가곡항을 지나면 나정고운해변이 펼쳐진다. 고운 모래사장이 부드럽게 발을 감싸고, 해변 곳곳에 세워진 조형물들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익살맞은 조형물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어느새 여정이 중반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여행의 목적이 풍경이든 사색이든,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촌항 근처로 향했지만 용굴 구간이 통제되어 있었기에 아쉽게도 우회로를 이용해야 했다. 자연재해 때문인지 보수 공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파랑길을 걷다 보면 종종 길이 막히는 일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때로 직선보다 우회에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우회를 마치고 마침내 감포항에 도착했다. 감포항은 전형적인 어촌의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이 진열된 어시장, 상인들의 분주한 손놀림, 손님들과의 흥정 소리, 그리고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까지. 하루의 끝자락에서 만난 이 생동감은 여정의 마침표를 활기차게 찍어주었다.


느리게 걷는 이의 미학


아침 햇살이 수평선을 어루만질 즈음 나아해변에 발을 디뎠다. 잔잔한 파도가 발끝을 간질이고, 해무 너머로 문무왕의 해중릉이 아스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을 등지고 바다로 향했던 왕의 고요한 용틀임이 이 해안선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막에서 앞서 가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앞서가려는 마음은 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성취는 빠를수록 좋고, 도착은 남들보다 앞서야 의미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그 믿음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앞서 걷던 이들이 멀어지면, 나는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지 못한 파도 하나, 바람의 결, 뒤돌아본 풍경이 내게는 더 깊이 다가왔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걸음 하나하나가 곧 완성된 여정이라는 사실을 해파랑길이 가르쳐 주었다.


감포로 향하던 그 길목에서 나는 더디게 걷는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멈춰 서기 위해 걷는 것, 오히려 천천히 걷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내 삶의 속도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결정인지, 바닷바람이 그 답을 속삭여줬다.


해파랑길 위에서 서두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가 도달해야 할 인생의 목적지는 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기에. 문무왕이 바닷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듯, 나는 나의 인생을 천천히, 단단히 지키며 살아가기로 했다.


11코스 문무대왕릉.jpg 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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