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작은 선물을 매일 받는 기쁨

해파랑길 23코스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

by 헨리황

고래불해변 → 병곡휴게소 → 금곡교 → 백암휴게소 → 후포항 (해파랑길 23코스, 11.6km)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걷는다는 건 발걸음을 옮긴다는 물리적 행위를 넘어선다. 사방이 바다로 물든 해파랑길 23코스 위를 걷는다는 건,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대화하는 일이다. 그 여정의 시작은 고래불 해변이었다.


고래불 해변은 이름부터 이야기다. 고려 말 문신 목은 이색이 이곳에서 고래가 뛰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불’이라 불렀다는 전설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가 되고 풍경이 된다. 이른 아침, 부드러운 햇살이 해변 백사장을 살짝 스치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조용한 음악처럼 들렸고, 바람은 송림 사이로 살랑이며 나를 맞이했다. 고래 모양 조형물에 올라 바라본 수평선은 무한했다. 여행의 출발점에서 이미 마음은 바다에 잠겼다.


백석해변을 지나며 어촌의 풍경이 펼쳐진다. 고요한 해변가에 정박한 선박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마을을 지키는 병사처럼 보인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해안 길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청초하다. 이어 병곡휴게소에 다다른다.


걷는 도중 마주한 금곡교는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여행자의 시간 사이를 잇는 다리처럼 느껴졌다. 아래로 흐르는 개천 위로 은은한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다시 발길을 옮겨 백암휴게소에 도착했다. 멀리 펼쳐진 동해를 바라본다. 그 바다는 나에게만 들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드디어 경상북도 영덕을 벗어나 울진 땅으로 들어선다. 최근 미래 청정수소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울진이지만, 내게 울진은 여전히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어촌의 이미지다. 저 멀리 후포항이 눈앞에 펼쳐진다. 항구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 정박한 배들 사이를 지나 걷는 기분은 마치 오래된 영화 한 장면 속을 걷는 듯하다.

후포항에 내린 바닷바람은 뺨을 스치며 오래전 텔레비전 속 장면을 소환했다. 정겨운 사투리, 다소 어색한 사위의 몸짓, 그 뒤로 펼쳐졌던 조용한 어촌 마을. 그렇게 나는 백년손님의 ‘남서방’을 떠올렸다. 낯설지만 따뜻했던 처가댁의 풍경이, 지금 내 눈앞의 후포리와 겹쳤다. 벽화마을 골목을 걷다 마주친 남서방 벽화는, 그 시절을 소환하는 타임머신 같았다. 평범한 일상도 사랑스럽고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줬고, 이 마을은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담아두었다. 등기산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그가 장모님과 마주 앉아 조용히 끓여 먹던 라면처럼 소박하고 진했다. 후포라는 이름 속엔 여전히 사람이 살아 있고, 그 일상을 곁에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남아 있었다.


후포항에 도착하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 바로 등기산이다. 작은 언덕을 오르자, 후포항 전망대와 후포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위로 이어진 스카이워크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바다 위에 투명 유리로 된 길을 걷는 것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발밑으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바닷바람이 뒤섞여 내 감각을 깨운다. 눈앞에는 갓바위와 하얀 등대가 나란히 서 있고, 뒤편으로는 오고 간 수많은 배들의 흔적이 느껴진다.


등기산 스카이워크를 지나 전망대에 오르자, 눈앞에 갓바위가 나타났다. 이름 그대로, 하늘을 향해 갓을 쓴 노인이 바다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햇살이 바위를 감싸고 있다.


후포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편의점에 발길을 멈췄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작은 공간이, 그 순간 나만의 쉼표가 되어 주었다. 컵라면 하나, 캔맥주 하나. 바다를 등지고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뚜껑을 벗기고 젓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짭짤한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방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국물 속에 녹아드는 느낌.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니, 탄산이 피로를 적셔주고 바다는 그 순간 더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어쩌면 가장 소박한 만찬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컵라면과 캔맥주는 여느 고급 레스토랑보다 더 진하게 기억될 것이다.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


언제부턴가 나는 하루를 버텨낸 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기로 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오르막길 끝에서 마주하는 산의 바람, 야구장 외야석에서의 함성, 그리고 분위기 좋은 벤치에서 후루룩 마시는 컵라면 한 그릇이다.


그 순간들은 아무도 몰라도 좋았다.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이자 격려라는 것이다. ‘오늘 수고했어’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방식이 나에겐 이렇듯 소소했다. 하지만 이런 작은 기쁨들이 내 삶에 색을 칠한다.

커피의 쌉싸래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하고, 트레킹 중 숨이 찰 무렵 맞는 바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을 준다. 야구장에서 함성은 일상의 긴장을 한순간에 날려주고, 컵라면은 단순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아간 나만의 작은 기쁨들이 결국 나를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멋진 사람으로 빚어간다. 내 삶은 내가 채우는 것이고, 그 삶이 반짝이도록 만드는 건 내가 나에게 주는 이런 사소한 선물들이다.

우리는 종종 거대한 성취나 특별한 날만을 기억하려 한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을 따뜻하게 덮는 건, 사실 별거 아닌 날의 작은 기쁨들이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오늘의 작은 선물이 내일의 활력이 되고, 그런 날들이 한 달을 웃게 만들며, 그 미소들이 다시 모여 한 해를 반짝이게 한다.


나는 더 이상 특별한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작고 소중한 기쁨들을 귀하게 여긴다. 그것들이야말로 나를 오늘까지 끌고 온 힘이니까.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인생을 보람 있게 만드는 건 멋진 사건이 아니라, 그런 날들이 쌓여 만들어진 나라는 사람이다.”


23코스 스카이워크.jpg 등기산 스카이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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