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에필로그 - 다시, 길 위에 서며

by 헨리황

처음 길 위에 섰을 때, 나는 몰랐다. 해파랑길 걷기가 내 인생의 다음 막(幕)을 여는 예고편이 될 줄은. 그저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막연한 욕망은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해파랑길. 이름부터가 아름다웠다. 푸른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이다.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거창한 철학도, 큰 계획도 없이, 나는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은 나보다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나를 맞이할 바람과 풍경, 소리와 빛, 그리고 나 자신을 비춰볼 거울 같은 순간들. 모든 것이 이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처음 걷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조용한 해변, 사람 없는 산책로, 이른 아침의 공기. 낯설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비워야만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걷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해야 할 말들, 하지 못한 말들, 남겨두고 온 후회와 어쩔 수 없었던 선택들. 마치 해풍이 내 어깨에서 짐을 하나씩 덜어주는 것처럼, 내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다양한 나를 만났다. 성급했던 나, 눈치를 보던 나, 지나간 시간을 되씹던 나. 그러다 문득, 이 모든 나를 품어주는 더 큰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지금의 나. 어떤 평가도, 비교도 없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충분한 나를 발견한다.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다만 걷게 함으로써 해파랑길은 그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길 위에서 나는 계절의 숨소리를 들었다. 봄날의 설렘, 여름의 뜨거움, 가을의 단단함, 겨울의 고요함. 각각의 계절은 삶의 한 단면처럼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나가도 괜찮다, 다시 오니까.” 그 말은 늦었다고 생각했던 내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50대, 나는 한때 인생의 내리막으로만 여겼던 이 시기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50대는 진짜 나로 살아가는 시작점인 것이다.


특히 고요한 겨울 바다를 따라 걷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토록 바쁘게만 살아왔을까?” 항상 앞을 향해,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달려왔던 지난날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에서 조금 물러나 있으니 비로소 삶의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바다의 색, 모래에 남겨지는 발자국, 낯선 이와 나눈 인사 한마디. 그 모든 것이 그날그날의 감각을 깨우고,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걷는 동안 나의 눈은 점점 풍경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되었고, 귀는 더 작고 여린 소리에 반응하게 되었으며, 마음은 점점 더 느긋해졌다. 길은 말이 없지만, 나는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어떤 날엔 그 대답이 파도 소리로, 어떤 날엔 낙엽 위의 바스락 거림으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진실이었다.


인생은 무대라고 한다. 그 말에 공감한다. 다만, 첫 번째 막에서 주어진 대사와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제는 내가 직접 무대의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이 두 번째 막을 ‘걷는 삶’으로 정의하고 싶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만 내 속도를 지키며,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삶.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타인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 삶이 필요하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쉼’의 기술도 배웠다. 멈추는 법, 비우는 법,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의 여유.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나는 멈춘 순간에 더 많이 배웠다. 앉아서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던 짧은 시간, 햇살 아래 책을 펼쳐 들던 오후의 고요함, 빗소리를 들으며 우비를 입고 걸었던 그날의 무게. 그것들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파랑길은 내게 말을 건넸다.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이제 나는 두렵지 않다. 미래가 불확실해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충분히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 길 위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다시 열리기 시작한 내 인생의 이막은, 나답게, 천천히, 그리고 깊이 있게 쓰일 것이다.


바람이 등을 밀어주고, 바다가 길을 열어주는 이 길 위에서 오늘도 나는 걷는다. ‘지금 여기’의 내가, 앞으로 나아갈 ‘나’를 환하게 맞이하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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