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를 읽고
지은 씨, 안녕하세요. 일단 오늘은 무탈하셨는지 묻고 싶어요. 오늘 몸과 마음은 안녕한지요. 지은 씨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지은 씨 아기의 몸과 마음은 어땠는지요. 전 오늘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두어 번 겁박을 했답니다. “그만해라 진짜. 지금 안 자면 엄마 나간다, 혼자 자는 거야.” 대충 이런 말들이죠. 이렇게 감정대로 말하고 나면 제 말투에 묻어 있는 끈적한 짜증에 저도 흠칫 놀라곤 해요. 더 놀랄 때는 언젠 줄 아시죠. 아이가 제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할 때요. 큰애가 동생과 놀다가 신경 거슬리는 일이 생기자 제 억양 그대로 “그만해라 진짜.”라고 하는데 무섭더라고요. 저 아이가 내 부정적인 감정의 모양과 내용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구나 싶어서요. 오늘은 비가 와서 오래 참아줄 수 없었다고 괜히 날씨 탓을 해봅니다.
저는 아이를 둘 키웁니다. 큰애는 네 살배기 딸이고 작은애는 돌 지난 아들이에요. 제 소개를 하려고 했는데 아이들 이야기가 먼저 나오네요. 애들 어린이집 방학이라 그런 것 같아요. 24시간 두 아이와 붙어 있는 일상에서 저라는 사람은 엄마로 불리고 엄마여야 하며 엄마일 수밖에 없어서요. 아이들의 세끼 밥을 차리고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다 보면 제 이름을 잊고 사는 듯해요. 지금은 그런 방학이 두려워 친정집으로 내려와 있어요. ‘엄마’라는 외침의 홍수 속에서 간간이, 그리고 다행히, 제 엄마가 제 이름을 불러줍니다. 역설적이게도 엄마의 삶에서의 구원은 또 엄마예요.
지금은 방학이라 왔지만 주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때 엄마 집으로 옵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그리 왕성한 활동을 하는 번역가는 아니었어요. 일 년에 한두 권 정도만 근근이 일감이 들어왔었죠. 그런데 큰애를 낳고 6개월쯤 되었을까, 어떤 자신감에서였는지 갑자기 들어온 번역 제안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아이가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는 순한 편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던 지난 반년이 지겨웠던 걸까요. 제 이름을 찾고 싶었나 봐요. 어리석었죠. 마감은 다가오지, 좀처럼 집중은 안 되지, 그 무렵 펼쳐 들었던 책이 있어요.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입니다. 글 쓰는 일을 하는 엄마들의 에세이를 엮은 책이에요. 이 책의 첫 글 첫 문단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엄마로 산다는 건 말야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불을 건너는 거야.’"
지은씨, 이런 문장을 보고 책을 덮을 수 있나요? 이 문장에서 저는 한참을 머물렀어요. 아이를 두고 아등바등했던 제 지난날들이 그 문장에서 보이는 듯해서요. 아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정말 행복한데 정말 불행했던 제 모습이 거기 있어서요. 아, 지옥불을 건너고 있어서 그렇게 뜨겁고 아프고 조바심이 났구나 싶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마흔에 등단했다고 하죠. 손원평 작가는 『아몬드』라는 책의 초고를 아기가 4개월일 때 썼다는 말을 작가의 글에서 본 적이 있어요. 이런 사실들이 제게 희망으로 다가왔었어요.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 않을까. 다들 애 키우고 살림하면서 무언가를 이루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재우고 깊은 밤에 일하다 보면 이제 막 한두 문장 썼을 뿐인데 아이의 칭얼거림에 흠칫 놀라 잠시 멈추게 되고, 다시 한두 문장 옮기면 미처 치우지 못하여 바닥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는 장난감들에 시선이 빼앗기기 일쑤였어요. 저건 또 언제 치우나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 씻으려고 쌓아둔 젖병이 떠올랐고 그러면 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죠. 다시 몸을 책상에 앉히고 한두 문장 보려고 하면 내일은 이유식 뭐 먹이지, 냉장고에 뭐 있더라 하면서 마음은 아기 옆으로 가고는 했어요. 그런 하루들이 쌓이다가 어느새 마감 기한이 임박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아기 짐과 노트북을 챙겨 엄마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손원평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마도, 분명히, 박완서도 못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에는 저와 비슷한 고군분투가 많아요. 쓰지 못하고 아이 옆에서 잠이 들었던 날들, 쓰기 위해 엄마가 필요했던 엄마들,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하여 애타는 마음들, 쓰지도 못했는데 죄책감까지 느껴야 해야 하는 순간들. 쓰는 사람에게, 쓰고 싶은 사람에게, 그게 버거웠던 사람에게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책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붙여 놓은 인덱스 스티커들로 책 옆구리가 아주 화려합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큰애 돌 전에 그렇게 고생하며 이제 애 다 키울 때까진 일 못 한다고, 안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둘째 이유식 시작 전, 다시 제안이 들어왔어요. 작은애는 큰애와 다르게 많이 울고 예민한 편이었는데, 터울이 얼마 나지 않는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남편은 거절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어요. 저번에도 했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그 마음이 잘못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드는 날이 부지기수였어요. 마감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예민해졌고 아이도 그런 제 마음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밤마다 더 깊이 잠들지 못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어요. 어쩔 수 있나요. 또 엄마 집으로 향할 수밖에요.
암흑 같던 그 몇 개월 동안 도대체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아이도 키우며 일도 하는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돈도 버는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차분하게 집중해서 글을 읽고 쓰는가 생각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그때 이 책이 다시 생각났고요. 이번에는 이 엄마들의 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엄마로 살면서 작가로도 사는 이들의 작품을, 그 모든 글자를 찍어내기까지 셀 수 없는 날을 숨죽여 울고 소리 내어 울었을 것을 생각하며 정성 들여 읽어보려고요.
아이를 키우며 놓았던 책을 다시 손에 잡으려니 어쩐지 마음이 들뜹니다. 아이들이 잠들어야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들어볼 수 있겠지요. 부디 우리가 잠들지 않기를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책부터 놓아버리지 않기를요. 그러나 책을, 그리고 나를 놓지 않겠답시고 아이들을 좁아진 마음으로 대하지 않기를요.
찌는 듯 덥다가 갑자기 시원해졌던 2025년 8월 9일,
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