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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미래

by 김현주

지은 씨에게.


어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분명 첫 편지를 보내고 홀가분함은 물론이고 앞으로 읽고 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 2주나 된다는 사실이 든든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너무 느긋했나 봐요. 중간에 지은 씨의 편지를 읽고 나자 조급해지더라고요. 앗, 아니,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아직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함께 읽고 쓰기로 한 이 결심 말이에요, 정말 큰 일인 듯합니다. 큰일 나긴 했지만 지은 씨의 편지를 읽다 보니 그 다정함 안에 계속 머물고 싶었어요. 우리 이 다정한 큰일을 잘 이어가보아요.


지난 2주 동안은 김미월 작가의 단편소설들을 읽었어요. 지은 씨는 단편소설을 좋아하나요? 저는 비교적 긴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긴 해요. 작품 속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고 참견하는 일이 재미있어서요. 그래서 영화보다는 시리즈물을 선호합니다. 같은 이유로 단편소설을 찾아 읽는 일은 제게 드문데요. 열 편이 넘는 단편소설들을 읽다 보니 그 맛을 조금 알 것도 같았어요.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온 듯한 충만함이 있더라고요. 장편소설이 31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서 산 하프갤런을 두고두고 먹는 것이라면 단편소설은 매장에서 맛보기 스푼으로 이것저것 조금씩 먹어보는 것 같았어요.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맛보듯 각각의 단편을 신선해하며, 단숨에 끝나버린 걸 아쉬워하며 어느새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어요. 태양계 외부 행성 중 하나가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어서 내일 새벽에 이 세계가 멸망한다는 배경이었어요. 소설 속 화자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탁자에 있던 복숭아 통조림을, 전날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가 너무 먹고 싶으니 돌려달라고 해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눠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음…… 부자?”
“내일 치아교정 끝나는 사람.”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웃지도 않고 계속 주워섬겼다. 내일 제대하는 군인, 내일 대학 합격 소식을 듣는 수험생, 내일 아파트 잔금 치르는 가장, 내일 아기를 낳는 임신부, 내일 태어나는 아기…… 가장 억울한 사람은 현재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기다릴 미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소설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라’라거나 카르페디엠 같은 당찬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소설 속 풍경은 오히려 덤덤하고 차분해요. 내일 어차피 죽게 되니 오늘의 쾌락을 찾지 않아요. ‘오늘 같은 날 세수는 무슨 세수’라고 생각하면서 세수를 합니다. 평소에 잘 연락하지 않던 이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고 추석 전날 같다고 생각하고요. 재밌죠. 몇 시간 후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데도 위트를 잃지 않는 친구도요. 저도 같이 풋-하고 웃다가 이 친구들과 또 같이 기다릴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저의 가치관으로는 기다릴 미래 자체가 세상의 끝날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아이들이었어요.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아까운 새끼들인데 이 아이들이 재잘대고 무해하게 웃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여름엔 땀을 뻘뻘 흘리고 겨울엔 코가 빨개지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어요. 특히 이들이 자유롭게 만들어갈 저마다의 삶을 더 보지 못한다면요.


오늘 아침엔 어쩐 일인지 제가 별로 피로를 느끼지 않았어요. 침대에 누운 채로 작은애와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하면서 놀고 있으니 아직 자고 있던 첫째가 부스스 잠을 깨우더라고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잠에서 깨서인지 일어나자마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댁에서 지내느라 지난 3주간 보지 못했던 아빠를 가장 먼저 부르고, 좋아하는 이모들의 이름 뒤에 사랑한다는 고백을 덧대더니 갑자기 이렇게 외쳐요.


“내 마음을 다 나눠 줄 거야!”


실로 사랑이 벅차올랐던 아침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이런 빛나는 순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억울하겠지만 이대로 세상이 끝난대도 여한이 없는 행복감이기도 했다는 게 아이러니였어요. 물론 동화 같던 아침은 그 순간으로 끝이었고 오늘도 내일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는 하루를 보내긴 했지만요.


그런데요 지은 씨, 제가 김미월 작가의 책이라 무작정 찾아 읽었던 『아무도 펼쳐 보지 않는 책』이 2011년에 출간된 책이더라고요. 무려 14년 전에요.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2022)의 김미월 작가가 쓴 수필을 다시 읽어보니 아이를 2015년에 출산했다는 거예요. 엄마의 글을 읽겠다 했는데 제가 읽은 책은 작가가 출산 전 발표했던 단편소설집이었어요. 부랴부랴 2019년에 출간한 책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를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읽다가 끝까지 다 못 읽고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버렸는데요, 글쎄 제가 가장 좋았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2012년에 발표한 작품이라네요. 결국 전 이번 주 엄마의 글을 읽지 못했지 뭐예요. 그래도 김미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지난달에 육아 에세이도 출간했다네요. 이렇게 읽을 책들이 점점 쌓여갑니다.


이제 지은 씨의 다음 편지가 제게 기다릴 미래입니다. 그걸 읽지 못하고 세상이 끝난다면 못내 아쉬울 거예요.



2025년 8월 24일,

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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