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을 읽고
지은 씨, 잘 지내고 있나요?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더니 이젠 낮에도 그리 덥지 않은 날씨가 됐어요. 끝날 것 같지 않던 긴긴 여름이 이제 정말 다음 계절에 자리를 내어주려나 봐요. 더위가 가시는 건 반갑지만 비염이 너무 심해서 힘든 계절입니다. 나무는 이제 괜찮아졌는지요. 그리고 지은 씨는 괜찮은지요. 저희 애들도 이제 콧물이 조금씩 도네요. 이러다 말기를 속으로 수천 번 되뇌고 있답니다.
"걱정 마. 엄마가 평생 몸을 팔아서라도 네 다리 고쳐줄게." (<환영>, 김이설, 164쪽)
지은 씨는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이 문장을 놓고 한참 고민해 보았어요. 목숨 같은 아이들을 위해 나는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하고요. 내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한 일들을 돌이켜보기도 했어요. 구차하게도요. 결혼 6년 만에 두 번의 유산 후 다시 품게 된 생명, 혹시라도 아이를 흘릴까 봐 임신 초기 병원에서 2주간 누워만 있었을 때 맡았던 소독약 냄새,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나는 그 지긋지긋함, 생살을 가르고 꺼낸 후 첫날 밤 칼로 배를 쑤시는 듯했던 통증, 마취가 잘되지 않아 썰고 도리고 벌리고 흔드는 느낌이 다 들었던 두 번째 출산,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선명할 너희는 내 속에서 나왔다는 표시. 그 이후로도 실은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할 때라는 말을 뼛속 깊이 실감하는 나날들. 그치만 아무리 가장 희생적인 순간들을 떠올려 봐도 말하면 말할수록 제가 치사해지기만 해요. 엄마라면 누구나 하는 것들이라서요.
나는 나의 무얼 팔아 아이를 먹여 살리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고작 내 시간, 내 편의, 내 취향, 내 취미, 이런 것들이라 민망할 뿐이에요. 아이들이 커서 제 기대에 어긋난대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할 수 없을 거예요.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를 살리겠다는 저 문장을 보고서 제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이설 작가의 소설은 호불호가 확연히 갈린다고 해요. 저도 지난 2주 동안 몇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너무 날것의 냄새가 난다고 느꼈거든요. 땀 냄새, 피 냄새, 침 냄새, 오물 냄새, 살 냄새, 물 냄새, 음식 냄새 등 각종 지린내와 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장들이었어요. 어리면 열세 살부터 살려면 몸을 팔아야 하는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거든요. 벼랑 끝에 선 것도 아닌, 추락하고 또 추락하는 인물들을 주목합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환영>에서는 가난한 집에서 장녀로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한 남자를 만나 갓난아이를 떼 놓고 일하러 가는 ‘윤영’이 주인공입니다. 윤영은 왕백숙집에서 홀서빙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식당 별채에서 돈을 더 쉽고 많이 벌 수 있는 매춘으로 남편의 고시 공부를 뒷바라지하고 아이의 분윳값을 대요. 처음에야 어렵지 점점 익숙해지고 과감해집니다. 이렇게는 살 수 없어서 모아둔 돈으로 옥탑방에서 조금 나은 반지하로 거처를 옮기고 매춘이 아닌 다른 일도 구하고 남편 공부를 그만두게 하고 아이도 데려와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 사고를 당해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남동생은 돈 떼먹고 도망가고 발달 느린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가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결국 윤영은 다시 왕백숙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소설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193쪽)
엄마는, 아이를 먹이려면, 입히려면, 살리려면, 고치려면 다시 이가 갈릴 만큼 참아야 하고 질겨져야 하고 다시 불구덩이로 뛰어들기 시작해야겠지요.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와 도저히 불가능한 계층 간 이동에 관한 고민은 차치하고 기꺼이 불행해질 수 있는, 기꺼이 비참해지기로 하는 엄마의 운명을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6개월쯤이었나. 간절히 바랐던 아기를 만났지만 바쁜 남편은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지방에 계시는 양가 부모님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렇게 불행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내가 이렇게 슬퍼도 되는 건가 했어요. 이 아이는 내가 아니면 살 수 없었고 이 집은 내가 아니면 집다울 수 없어서 버거웠어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러는 중간중간 집안을 치우고 닦고 빨래를 돌리고 개키고. 매일 해치워도 매일 같은 양의 일이 몰아닥쳤고 조금만 쉬면 쉰만큼 더 힘들어졌어요. 집안 살림과 아이 살림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날, 살림, 이라는 말을 풍선껌처럼 불어본다는, 살림, 이라는 말을 빨고 빨고 또 빨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둔다는 시를 읽은 적이 있어요. 내 작은 희생이 못내 억울하여 살림을 죽음처럼 여기고 있던 날이었어요. 말간 아이의 눈을 보고 너를 살리는 일인데 어미가 불평이 많았다고 말하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던 날이었어요.
지은 씨, 고단한 날의 연속이지요. 몸도 마음도 힘든데 내가 나로 살 수 없어서 슬프기까지 한 삶이에요, 엄마로 산다는 건. 엄마로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겠지요. 나를 언제나 감정의, 육체의, 생활의 궁지로 몰아넣는 아이들이,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내가 다시 살아가게 해요 오늘도. 때로는 정말 질리게 하지만 오늘 아이가 짓는 미소는 또 다시새롭네요. 그럼 또 우리는 다시 시작하지요. 살림의 자리로 갑니다. 누군가 닳아야 한다면, 죽어야 한다면, 아무래도 그게 나인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지은씨의 살림을, 모든 엄마의 살림을, 그리고 그 모든 죽음을 슬퍼하고 헤아려봅니다.
2025. 9. 23
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