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상상력의 힘, 글쓰기의 핍진성
연기학원에 다녔던 적이 있다. 회사에서 날 괴롭게 하는 어떤 이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아무튼 당시의 내게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이 꼭 필요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기 공부를 찍먹한 것은 내게 큰 교훈을 남겼다.
첫 수업에서 배웠던 것은 사과깎기였다. 눈 앞에 사과가 있다고 상상하고 사과를 깎아보는 것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았다. 다들 놀랍도록 진지한 얼굴로 사과를 깎는 나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나 빼고 모두가 정말 사과가 보인다고 믿는 표정이었다. 진짜 보이는 건가 싶을 만큼 아리송했다. 덕분에 처음 겪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진지한 마음으로 사과깎기에 마저 임할 수 있었다.
‘이게 맞나? 다 깎았는데? 언제까지 깎아야 되지?’
손을 멈추고 눈치를 보자 선생님께선 눈치껏 박수를 유도하셨다.
우리반 학생들은 연기를 전공했거나 이미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내게 주는 격려의 박수는 되려 식은땀이 나게 했다. 이어지는 선생님의 피드백.
“사과를 깎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화영씨?” “칼…이요?”
“화영씨가 방금 사과를 깎을 때 쓰셨던 칼은 어떤 칼이죠?” “과…도...?”
“그 칼은 어디서 갑자기 생겼나~ 허공에서 생겼나~?”
조금 울고싶어졌다. 내향인 중의 극 내향인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내가 배운 것은 ‘비물체 연기’였다. 말 그대로 물체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빼빼데’라고도 하며 우리가 흔히 아는 ‘메소드 연기’의 가장 기초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사과깎기에 실패했다. 선생님께서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와 상황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어떤 사과를 깎고 있는지, 사과의 크기는 어떠한지, 질감은 어떠한지… 내가 보여준 연기는 마술사의 연기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과를 갑자기 나타난 칼로 대충 껍질 깎는 흉내만 낸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에 이 사과가 존재한다고 믿게 하려면 배우 스스로 먼저 이것을 보고있다고 믿어야했다. 내 눈에는 사과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수업부터는 한층 확장된 주제를 배워나갔다. 같은 반 사람들을 내 방에 초대해 방을 소개하는 연습,
내 앞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연습… 어느 순간 연습하다보면 눈 앞의 상대가 선명히 보이게 될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게 될 때 한층 성장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글쓰기도 연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세계는 상상하는 만큼 존재하고, 글쓰기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내가 만든 세계의 인물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할까?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노력해야겠다. 언젠가 그들이 핍진하게 대답해줄 날이 올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