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

by 영이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


처음으로 나 아닌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했던 친구가 있었다. 걘 나랑 한 학기가 넘도록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원래 말이 없는 친구라 아무와도 말을 잘 하지 않았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도 없었다. 다가가려고 시도한 친구들은 많았지만 워낙 입을 열지를 않아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피구를 한다고 거칠게 놀다가 미진이 앞에 공이 떨어지면 다들 눈치를 살피면서 야, 미안! 하고 공을 주워오기도 했다. 그러면 미진이는 말없이 괜찮다는 듯 미소만 띄었다.



미진이의 얼굴은 햇빛 한 번 본적 없는 것 처럼 하얗고 볼살이 통통하니 납작하고 동그랬다. 눈썹은 엄청 짙고 숱이 많았고, 볼과 입가 사이 어디쯤에 점이 하나 있었다. 항상 깻잎머리에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다녔다. 미진이의 옷 중에 빨간색 반팔 티셔츠가 있었는데, 목 테두리를 따라 초록색 딸기 꼭지 무늬가 있고 딸기씨가 군데군데 콕 박혀있었다. 그 옷을 입은 미진이가 제일 좋았다. 볼에 붙은 점이 딸기 씨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걔가 전미진이었는지 손미진이었는지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미진이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초등학교에선 체육시간에 키 순으로 줄 서게 하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내 키는 한평생 중간값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중간. 방학이 지나고 오니 친구들의 순서가 조금씩 바뀌었다. 나랑 미진이는 그대로였다. 선생님은 미진이와 나를 기준으로 앞 뒤로 키 순으로 서라고 하셨다. 미진이는 내 앞, 나는 뒤. 방학 중에 전학을 가는 친구도 있었다. 짝꿍 활동을 해야하는데 순서가 한 칸씩 밀렸다. 그 바람에 미진이와 2학기 체육시간의 짝꿍이 되었다.



체조를 하면서 미진이가 간지럼을 많이 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을 맞대고 뒤돌아 서로 팔짱을 끼고 들어올리는 동작을 하는데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는 미진이를 보았다.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나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미진이는 여전히 조용히 혼자였다. 그렇게 학년이 바뀔 때까지 미진이와 나는 체육시간 짝꿍으로 지냈다.



말하는 쪽은 항상 나였지만 미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어디선가 공이 날아오면 몸을 날려 막아주고, 다른 애들은 절대 한 입도 안주고 몰래 숨겨둔 얼음물을 미진이한테만 나눠줬다. ‘너 미진이랑 말 해봤어?’ 라는 친구들의 물음에 ‘뭐, 그냥?’ 하고 쿨한 척 넘겼다. 그치만 새침하게 ‘고마워’ 하던 목소리가 잠들기 전에도 불쑥 생각이 났었다. 미진이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지켜주고 싶었다.



학기가 끝날 쯤엔 날이 추워 자연스럽게 우리가 짝꿍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미진이에 대해 생각하는 날도 적어졌다. 그래서 미진이가 몇 반으로 배정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직도 가끔 미진이가 생각날 때가 있다. 어떻게 컸을지, 지금은 말수가 좀 늘었을지, 여전히 그때처럼 생겼을지 궁금하다. 아마 나는 지금도 조용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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