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멸종 위기 사랑
요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놈이 그놈’ 같다. 플랫폼만 다를 뿐, 작품들의 구조와 문법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검증된 웹툰 원작, 강한 장르적 후킹,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빠른 전개.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의 상품처럼 보인다. 아는 맛이 맛있긴 하니까. 이런 풍경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20년 전 이 기시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초, 방송국 주도의 공채 탤런트 시대가 저물고 대형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다. 1990년대까지 지상파 방송국은 공채 탤런트 제도를 통해 배우 공급 구조를 통제하고 있었다. 캐스팅 권한 역시 방송국 PD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공채 시스템이 약화되고 배우들이 자유계약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벤처 자본이 유입되며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스타를 관리하고 공급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스타가 매니지먼트 회사에 집중되면서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톱스타를 캐스팅하는 조건으로 자사 소속 신인을 함께 출연시키는 방식의 패키지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방송국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캐스팅 권한 역시 점차 약화되었다. 이 변화는 한국 드라마 산업이 방송국 중심 구조에서 제작사·매니지먼트 중심 구조로 이동하는 첫 번째 분기점이었다.
진흙 속에서 캐내는 자연 진주가 아닌, 조개 속에 이물질을 넣어 만든 양식 진주들처럼. 철저한 콘셉트 기획과 자본을 기반으로 ‘완성된 상품’으로서 생산된 연예인이 현재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이 변화가 모든 것을 나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매니지먼트 산업의 성장 덕분에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훨씬 체계화되었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니까.
2026년 현재, K-드라마 산업은 스타 발굴 시스템의 변화와 놀라울 만큼 닮은 또 하나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플랫폼 자본이 제작비, IP, 배급, 데이터를 동시에 쥐게 되면서 콘텐츠 산업의 의사결정 구조는 크게 달라졌다. 투자 규모가 수백억 원 단위로 커진 시장에서 플랫폼과 투자자는 자연스럽게 리스크 관리 중심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이미 검증된 IP, 글로벌 장르 문법, 강한 시각적 후킹을 가진 프로젝트가 상대적으로 우선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드라마는 점점 더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설계되기 시작했다. 과거 매니지먼트 회사가 스타를 패키징했다면, 지금은 플랫폼과 대형 스튜디오가 콘텐츠를 패키징하는 시대다. 이는 콘텐츠 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제작-유통-데이터’ 권력이 하나의 주체에게 집중된 순간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IP 자체를 중심으로 세계관과 산업을 확장하려는 ‘스튜디오형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등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이브(HYBE)다. 하이브는 아티스트 IP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웹툰·게임·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멀티 콘텐츠 IP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이제는 IP 자체가 산업의 중심 자산이 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고, 이미 변화했다는 증거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글로벌 OTT를 어떻게 대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OTT는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으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기존 방송 편성 체제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장르와 포맷에도 기회를 제공했다. 콘텐츠 산업의 권력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방송국에서 매니지먼트 회사로, 그리고 플랫폼과 IP 기업으로. 중심은 계속 이동해 왔다. 그저 20년 전 촉발된 전쟁이 긴 휴전을 끝내고 다시 시작된 것뿐이다. OTT가 아닌 그 어떤 것이 새롭게 생겨도 대응할 수 있는 탈출구가 필요하다. 그 답은 내부에서 찾아야만 한다.
결국 오늘날 콘텐츠 산업의 경쟁은 좋은 작품 하나를 만드는 경쟁이 아니라, IP를 중심으로 얼마나 다양한 콘텐츠와 플랫폼을 연결할 수 있는가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양식 진주’ 산업의 탄생일지도 모른다.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은 디즈니와 픽사, 넷플릭스같은 성공한 대형 글로벌 기업의 구조를 한국 콘텐츠 산업에 ‘복붙’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분야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어왔고, 그래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양식 진주도 적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감동이 없다.
감동이 배제된 완벽한 공산품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바로 ‘로컬 오리지널리티(Local Originality)’다. 거대 자본과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전 세계 수억 명의 보편적인 입맛을 맞추기 위해 가장 빠르고 자극적인 전개를 요구한다. 이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속에서, 한국 콘텐츠 특유의 끈끈한 정서와 사람 냄새 나는 투박함은 불필요한 불순물로 취급되어 거세되고 만다.
최근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벌어진 흥미롭고도 씁쓸한 두 작품의 대비는 이 뼈아픈 현실을 정확히 찌른다. 한국 최고의 작가진과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넷플릭스 텐트폴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글로벌 1위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이 전 세계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든 건 한국이 아닌, 일본 소도시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화면 속 배경은 일본 관광청 홍보 영상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유려하고 완벽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글로벌 흥행을 위해 '가장 세련되고 예쁜 그림'을 좇은 결과, K-콘텐츠의 최전선에서 남의 나라 오리지널리티를 팔아주고 있는 다소 아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반면, 미국 스튜디오와 거대 자본이 주도하여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세련된 가상의 도시나 화려한 랜드마크 대신, 서울 낙산공원의 비탈진 골목과 고궁의 투박한 선을 집요하리만치 날것 그대로 담아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전 세계의 팬들이 화면 속 진짜 '한국적인 정서'에 열광하며 서울로 몰려들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려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한국 제작진과,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자연스러움'을 발굴해 무기로 삼은 해외 제작진. 이 극명한 대비는 현재 K-콘텐츠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본의 규모로 거대 플랫폼과 싸울 수 없다면, 그리고 화려하게 조립된 양식 진주가 더 이상 시청자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시 쥐어야 할 무기는 결국 다름 아닌 '정서'다.
“왔다네. 정말로. 아무도 안 믿었던. 사랑의 종말론” 이찬혁의 〈멸종위기사랑〉의 가사. 사랑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 담긴 이 곡의 성공은 이유가 있다. 모두가 사랑 노래를 부르짖을 때, 순수한 사랑이 멸종해서 이제는 더 이상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정면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제는 없어져 버린 그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사랑의 부재로서 증명해 보인다. 중간 지대가 붕괴된 이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오리지널리티를 쥐고 살아남으려는 창작자들의 생존 방식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중간 사다리가 사라진 드라마 산업에서 작가를 꿈꾸는 우리가 걸어갈 길의 답이 여기에 있다. 진짜 드라마가 사라진 드라마 판에서 드라마를 말해야 한다.
물론 자본이 하향식으로 찍어내는 ‘공장형 원작’을 비판하면서도, 작가들이 IP 생태계를 두드리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순수 오리지널 대본으로는 투자를 받기 힘든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기획을 웹툰 포맷으로 우회하여 승부를 띄우기도 하고, 지역 IP 공모전 같은 틈새시장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거대 자본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온전한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기 위한 지독한 뚝심이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처절한 생존 방식이다.
자본의 크기로 플랫폼과 경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콘텐츠 산업에서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플랫폼이 복제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생활의 디테일과 정서의 구체성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에 끌린다. 완벽하게 설계된 캐릭터와 자극적인 연출은 순간적인 도파민을 제공할 수 있다.
2000년대 우리가 사랑했던 드라마들이 모두 티 없이 순수했던 것은 아니다. 출생의 비밀이나 기억상실증 같은 자극적인 조미료가 남발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수많은 작품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억지스러운 전개 속에서도 인간관계의 미묘한 감정선과 삶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은은한 명작'들이 굳건히 허리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백억 원의 CG와 장르물이 쏟아지는 넷플릭스 시대에도, 화려한 자극 하나 없이 사람의 밑바닥까지 후벼판 <나의 해방일지>나 <동백꽃 필 무렵> 같은 촌스러운 정서의 작품들이 신드롬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들은 결국 아무리 화려하게 조립된 공산품이 쏟아져도, 그 속에서 멸종된 줄 알았던 ‘진짜 사랑’과 조우할 때 비로소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글로벌 콘텐츠 경쟁력은 더 세련된 영상이나 더 큰 제작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담고 있는 고유한 정서와 공간성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글로벌 스탠다드를 좇으며 점점 더 비슷한 장르 문법과 미장센을 반복하는 동안, 오히려 해외 제작자들이 한국의 로컬리티를 더 매력적인 콘텐츠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리티는 공간적 배경이나 관광 이미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인 우리만의 말투, 관계, 눈치, 가족을 대하는 방식 같은 정서의 구조를 뜻한다. 플랫폼 시대에 작가가 붙잡아야 할 것은 더 큰 자본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삶이다. 정서의 구조를 욕망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들었던 특정 시점의 특정 경험을 가진 ‘나’를 떠올린다. 예술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만 소비되어서는 안된다. 그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이 개개인이 가진 경험을 꺼낼 수 있을 때, 작품을 통해 ‘나’를 바라볼 때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멸종된 시대에 진짜 사랑의 본질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열광하듯, 작가를 꿈꾸는 우리가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할 무기는 결국 가장 투박하고도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정서다. 중간 예산 드라마는 사라졌지만 중간 예산의 정서는 장르 안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1년 차 작가 지망생으로서, 촌스럽고 유치하지만 은은한 맛의 그런 드라마를 언젠가 꼭 쓰겠노라 감히 다짐해 본다.
멸종 위기에 처한 사랑을, 그리고 은은한 명작의 불씨를 활활 살려내는 것. 그것이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창작자들이 거머쥐어야 할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리고 그런 빛나는 이야기를 알아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보는 눈 있고 용기 있는 제작자들의 몫일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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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글로벌 OTT 서비스가 지역 영상제작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 사례를 중심으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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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 「K콘텐츠 위기론에서 봐야할 것」, 2025.1.2.
PD저널, 「2026년 콘텐츠 시장 위기 벗어날까」, 202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