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파라고네

드라마라는 번역의 예술

by 영이

드라마와 파라고네


1. 파라고네: 예술은 늘 서로를 비교하며 탄생한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드라마는 도대체 어떤 예술일까. 드라마를 과연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선택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주말의 약속을 잡을 때도, 저녁 식사 시간에 무엇을 볼지 고민할 때도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인간은 어쩌면 그렇게 비교하도록 설계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드라마는 더 이상 다른 드라마와만 경쟁하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켜면 수천 편의 영상이 쏟아지고, 유튜브와 숏폼, 게임과 음악이 동시에 우리의 시간을 낚아챈다. TV를 틀어 놓은 채 스마트폰으로 숏폼을 넘기고 노트북으로 또 다른 영상을 재생하는 멀티태스킹은 현대인의 기본값이다.


이 무한 경쟁의 환경을 바라보다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파라고네(Paragone)’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회화와 조각 가운데 어느 예술이 더 우월한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각은 실제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성을 강조했고, 회화는 빛과 환영을 통해 세계를 재현하는 능력을 내세웠다. 파라고네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서열 다툼이 아니었다. 서로를 맹렬히 비교하고 부딪치는 과정 속에서 각 예술은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정체성을 발견해 나갔다. 예술은 늘 다른 예술과의 긴장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온 셈이다. 우리가 쓰고, 또 쓰고자 하는 드라마 역시 그 길고 치열한 파라고네의 역사 한가운데 놓여 있다.


2. 드라마의 자매예술: 훔치고 엮어내다

대본이라는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드라마는 여러 문학예술이 만나는 교차로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를 이해하려면 그 곁에 있는 자매 예술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핏줄은 연극이다. 드라마는 연극으로부터 대사와 행동을 통해 인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방식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드라마는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연극의 공간적 제약을 넘어선다. 카메라는 인물의 미세한 표정과 시선을 포착하며 이야기의 밀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소설 역시 중요한 자매다. 두 장르는 모두 서사를 뼈대로 삼는다. 소설이 활자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직접 서술한다면, 드라마는 철저히 보여주어야 한다. 숨소리와 눈빛, 그리고 행동으로 심리를 증명해야 한다.

시각 매체라는 점에서 영화와 웹툰의 언어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가 압축된 시간 속에 강렬한 미장센을 새겨 넣는다면, 드라마는 긴 호흡으로 인물의 서사를 축적하며 다음 회차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웹툰의 칸과 드라마의 컷은 마치 같은 템포를 가진 다른 노래처럼 서로 닮아있다.


한편, 드라마는 건축과도 묘하게 닮았다. 대본은 감상하기 위한 활자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인 하나의 설계도에 가깝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구조를 세우고 사건이라는 기둥을 세우며 주제라는 지붕을 얹는 과정은 집을 짓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드라마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변 예술들의 언어를 흡수하며 형태를 갖춰가는 장르다.


3. 번역의 예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서사로

드라마의 무수한 자매예술 가운데 창작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술은 무엇일까.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씬을 구상할 때 음악을 듣는다. 어떤 멜로디는 장면의 공기와 온도를 떠올리게 하고, 어떤 리듬은 인물의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 음악에서 불러오는 개인적인 경험과 정서는 캐릭터에 이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예술 이론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상호매체성' 혹은 하나의 예술이 다른 매체의 언어로 변환되는 '매체 간 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음악이 가진 보이지 않는 리듬과 정서는 글을 쓰는 순간 서사의 구조로 번역된다. 선율의 고조는 장면의 클라이맥스가 되고, 쉼표는 인물이 삼키는 침묵이 되며, 변주되는 템포는 화면이 넘어가는 편집점의 리듬으로 바뀐다.


4. 파라고네의 한가운데에서

르네상스의 파라고네가 회화와 조각의 낭만적인 결투였다면 오늘날의 파라고네는 훨씬 가혹하고 복잡하다. 영화, 게임, 숏폼, 음악 등 수많은 매체가 대중의 한정된 시간을 두고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살아남는 방식은 다른 매체를 배척하거나 더 강한 자극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의 진짜 힘은 다른 예술의 언어를 끌어안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포용과 번역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배우는 입장이지만 조심스럽게 이렇게 정의해 본다. 드라마는 수많은 예술이 교감하는 거대한 번역의 장소라고. 이 파라고네 한가운데서 연극의 대사와 영화의 시선, 건축의 구조와 음악의 리듬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사람. 어쩌면 드라마 작가란 그런 번역의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꾼이면서도, 번역가의 숙명이라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행복한 고민 같다. 청각의 리듬이 시각적 이미지로, 다시 활자의 서사로 변하는 번역의 과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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