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사람의 불안 (4)

잘해왔다 그럼에도

by 퐝클리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되뇌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문제와 아직 지적되지 않은 위험 그러면서 아직 생기지 않은 실수들을 먼저 떠올렸다. 대개 눈앞에 있지 않았지 늘 그 가능성부터 계산한 것이 문제였다.


일에는 손에서 놓아야 할 때가 있다.

더 고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더 고치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다. 머리로는 안다. 이쯤이면 충분하고 지금 상태로도 무리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끝까지 잘하려고 하기보다, 끝까지 붙잡고 있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완성보다 미완을 쥐고 있는 시간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오늘 좋았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고맙다고 답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다. 칭찬은 안심이 되기보다 검증의 대상이 됐다. 진짜로 하는 말일까? 다음에 문제 삼기 위한 예고는 아닐까? 다음에도 이 정도만 하면 되는 걸까? 잘했다는 말 뒤에 따라올 문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을 빠르게 하는 타입은 아니다. 원고 1분을 쓰는 데 1시간이 걸렸다. 문장을 고치고, 다시 지우고, 또 의심했다. 혹시 놓친 맥락은 없는지 오해를 부를 표현은 아닌지,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를 생각하며 하루를 소진했다.


불면증이 찾아왔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24시간 뉴스 속보 알람을 켜두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하며 이 순간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 불안한 건 나만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개인의 불안을 사회의 소음 속에 섞어두면 조금은 덜 튀어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옳았을까. 하나의 사례를 만들기 위해 백 명에게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비슷한 고통을 모았다. 조금 더 오래 버틴 이야기, 조금 더 심하게 망가진 순간, 조금 더 말하기 어려운 장면을 찾았다.
나는 사람들이 불편한 질문을 이어갔고 그렇게 모은 말들 중에서 쓸 만한 것만 남겼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그토록 내가 혐오하던 방식의 방송과 다르지 않았다.

맥락은 잘려 나가고, 고통은 요약되었고, 사람은 하나의 사례로 정리됐다. 불안을 던져놓고, 그 불안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생각하지 않는 방식, 내가 비판해 왔던 바로 그 전달법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나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 많은 불안을 호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끝까지 잘하려고 했다는 말로,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책임을 지운 것은 아니었을까.


잘 해왔는데도 불안한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불안은 실패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 너무 오래 대비한 결과다. 성실함은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지만 멈추는 법까지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실하게 움직인다.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상상한다.

그런데 이 성실함은 정말 나를 지켜주는 것일까, 아니면 불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가 끝까지 붙잡고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일까?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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