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 사이에서
권력에 의해 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적어도 나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없었다. 증거가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떤 권력에 의한 폭력 일 수 있음으로 의심하거나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방송의 대주제는 ‘살아있는 힘’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말은 다뤄질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분이 겪은 고통은 비판을 위한 장치였다.
틀린 방법은 아니다. 단지 여기까지가 방송의 언어인 거다.
방송의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의 최소한이며, 방송이 나간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한 번 쓰이고 사라지는 언어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에도 사람의 시간은 계속된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준 분의 사연을 계속 방송에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최대한의 언어를 쓰지 못했다는 점도 죄송했다.
어떤 분은 방송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상황을 공유해 왔다.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자신을 누르는 무거운 힘은 1그램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방송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새로운 이슈가 크지 않다면 같은 아이템을 두 번 다루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회의에서는 늘 비슷한 질문이 돌아온다.
“그 이후에 달라진 건 있나?”
“지금 시점에서 새로울 게 있나?”
질문은 합리적이고, 판단은 효율적이다.
다만 그 기준은 방송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
시간이 지나자
방송에 출연했던 분들의 연락을 받는 일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다.
반대로 단 한 번의 방송 출연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 뒤의 일은 자기들의 몫이라며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그럴 때마다 내가 누군가의 사연을 한 번 쓰고 지나간 건 아닐지, 사연을 소비한 건 아닐지 그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서글픈 순간은 인터뷰이가 말을 고치기 시작할 때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왜 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무엇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는지.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문장이 짧아진다.
방송에 쓸 수 있는 말. 이 프로그램의 톤에 맞는 말이 된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방송에 나가느냐에 따라 말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을 인터뷰이는 이미 알고 있다.
몇 시간을 나눈 대화는 결국 몇 분으로 정리된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도 인터뷰이다.
그 점이 유난히 서글펐다.
날것의 말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남았다.
그래서 가끔 헷갈린다. 내가 방송에 어울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이 구조가 사람의 시간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는 건지. 혹은 누구나 같은 곳에서 오래 경력을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권태를 굳이 구조의 문제로 묻고 있는 건지구조 밖으로 나온 지금도 그 질문은 계속 되새겨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