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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이 Nov 01. 2023

번듯한 직장을 왜 뛰쳐나왔냐면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회사 건물을 빠져나갈 때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음속 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내 것이 아닐 이름 없는 일들에 휩싸여 오늘도 수없이 나를 지우고 또 지웠다. 그저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냈을 뿐인데 어쩌다 내 삶은 밑 빠진 독처럼 텅 비어버린 걸까. 하지만 나는 안다. 다음 날 피곤한 몸을 일으키고 나면 내 삶은 다시 0으로 돌아갈 것이고, 언제 끝날지 모를 일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中-



 돌이켜보면 스물두 살의 나는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사내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퇴근 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술자리가 아니면 쓰디쓴 소주를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집에 들어서면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정신과에 가볼까 수없이 고민했다. 무능하디 무능한 나와, 앞에서는 미소를 머금고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며, 가르침에는 비웃음을 띠는 사람들,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수많은 날들에 무력하게 무너져갔다. 매일이 좌절과 자괴감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우리의 윗세대는 어떻게 이러한 부조리와 이중적인 사람들을 감내해가며 우리 세대를 키운 것일까. 착실하게 교육 과정을 밟아왔듯, 사회에서도 여느 직장인들처럼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가장 입사를 바라온 회사에서조차 버티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에서 적응하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불 지르고 도망가고 싶다.

말이라도 응원해주는 동기들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표 썼다.


그냥 차라리 내 멘탈이 거지처럼 약하다고 해줘

내가 꿈에 그리고 원하던 직장이 X 같은 건 아니라고 해줘"


 벌써 희미해져 가는 그 당시에 아무렇게나 써 내려간 글에서 가져왔다. 날것 그대로 감정을 휘갈긴 문장이 가득하다. 오로지 나만 약자이자 피해자인 것 같던 그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파고들 힘조차 없었다. 아직도 원인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내 머릿속을 뒤죽박죽 부유하고 있어, 스스로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심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려고 한다. 왜 회사가 싫었고, 결국 퇴사를 결심했을까?





자식이 없다

 나는 지금 당장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이 없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후는 완전하게 다른 세상이라고들 한다. 일이 힘들고 부부관계에 지쳐도 오직 아이 하나만 보고 산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부모님 세대는 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주기의 당연한 과업으로 생각했기에 내 나이쯤 결혼해서 일찍 출산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기와 육아의 시기가 엇비슷했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은 일을 해야 벌 수 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직장생활을 지속한 6070 세대는 굉장히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모성과 부성을 크게 쳐주는 것은 희생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이는 고착화된 낡은 편견이므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사회적인 현상을 내가 아는 작은 범위 내에서 판단했지만, 이러한 세대 간의 차이를 이해하면서 나와 부모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당장은 나만 배를 곯면 된다. 나의 행동에 대한 대가는 현재의 내가 짊어지면 된다.



사람이 가장 힘들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이던 21년 8월 첫 정규직 입사를 했다. 줌을 활용한 비대면 교육을 몇 개월동안 들어야 했기에 동기들과 회사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합숙 교육을 하는 단 한 달이었다. 그 기간 중 열흘 정도를 떠올리자면 죽마고우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것처럼 따뜻하고 행복해진다. 동기들은 모두 정이 많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그토록 죽이 잘 맞고 방향성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스물한 살의 나에게는 그러한 행운도 따라주었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자 같은 해 12월 이직을 했다.


 새 회사에서는 3개월 동안 업무분장을 받지 못해 일이 없어 멍하니 앉아있었고, 코로나로 인해 징검다리식 재택근무를 했다. 부서원이 모두 부서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반년만에 겨우 첫 회식을 했다. 팩스 사용법을 반년이 지나기 전에 겨우 배웠으니 말 다한 거다. 게다가 부서 사람들은 모두 평균연령 40대의 남자였고 세대가 달라 공통분모가 없는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험이 적어서인지 나는 공적인 곳에서 말수가 없어진다. 이 설상가상의 원인들로 인해 적응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년동안 인사만 하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들은 내 스스로 사회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의 부캐가 다들 있다고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사회부적응자였다. 팬데믹 초창기에 집에 갇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질 때도 공부와 운동을 하며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었다. 부정적 감정에 잠식되지 않고 무엇이든 이겨냈을 만큼 정신력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상과 직장 사이의 거대한 괴리감에 무력함을 느낄 뿐이었다.

 3개월이 지날 무렵, 주 업무로는 수율을 맡았다. 업무 이름만 떠올려도 몸서리가 쳐진다. 인수인계는 종이 몇백 장을 던져주며 시작됐다. 그냥 셀 수 없이 많은 데이터를 비교하라고 했다. 7년 차가 되는 대리님과 이제 막 입사하여 백지로 시작하는 나는 엄연히 다른 선상인데도 사실상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이걸 모른 채로 어떻게 이 회사를 다니고 있냐고 핀잔을 줬다.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누구도 말 걸지 않았는데 말이다. 수율은 부서에서 가장 중요한 메인 업무이니 긴장하라고 했다. 수율 업무의 권장 직급은 과장이었지만 나는 일개 3개월 차 사원이었다. 업무 플로우를 모르니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고 그때마다 덤벙대는 바보 취급이 돌아왔다. 어디에도 내가 편하게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부서원들조차 나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어보더라. 그제야 업무가 힘들어 눈물이 나오는 줄로만 알았던 나날들이, 사실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 둘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공기업에서는 개인주의로 생활하면 승자라고 말한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회식 미참여는 물론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 또한 공동체에 속해 느끼는 안정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직장에 있는 수많은 시간 동안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회적인 동물로서 당연히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굳이 오랜 친구 같은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으나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되 편안한 관계가 필요하다.

 이번 회사는 절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어쨌든 의지를 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퇴사는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노력해보지 않고 도망친 것이 후회된다. 만약 사회생활을 새로 시작할 기회가 생긴다면,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서서 일을 배우는 자연성 직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몸이 안다

 회사를 다니며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병원에서는 20대 초반이 이렇게 허약해도 되냐며 생활습관 전반을 바꾸라고 진단 내렸다. 고등학교까지는 감기조차 몇 년 동안 한번 걸릴까 말까 하던 나였다. 대학생활 내내 밤새 술을 먹고 그대로 등교하고, 하루에 두 번 운동과 두 번의 약속도 쉽게 소화하며 누구보다 멋진 체력을 뽐냈었다. 회사를 다니던 이 년 내내 아프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한여름에 감기로 한 달 내내 고생을 하고, 완치되었던 가벼운 병이 5년 만에 훨씬 심하게 재발하여 수술을 하지 않나,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기면 감염되어 염증이 되기 십상이었다. 회사에서는 항상 두통에 시달렸고 한 군데가 나으면 다른 곳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평생 다녔던 병원보다 그 기간 동안 다닌 병원이 몇 배로 많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맞다.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직장에서-특히 공기업에서 자기계발이나 발전을 바라면 안 된다지만, 이걸 왜 하는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업무들이 넘쳐났다. 부서 말단의 막내였던 나는 중요도가 낮고 루틴한 업무를 도맡아 했다. 처음에는 상사가 시키니 고분하게 따랐으나, 갈수록 이 회사에 하등 도움도 안될 법한 페이퍼워크로 서랍이 가득 찼다. 불만을 토로하니 누군가는 내게 배가 불렀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맞다. 조금 귀찮다 뿐이지 해당 업무 강도는 감히 신의 직장이라 할만큼 현저히 낮다. 월급만 따박따박 입금해주면 지루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율 업무도 일 년이 넘어가니 어느 정도 내 몫을 하기 시작해서 욕먹을 일도 적었다. 힘들지만 그럭저럭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취감은 스포츠나 취미생활에서 찾으면 되니, 일은 그 수단일 뿐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신념은 시간이 흐르며 바뀌게 되었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근면하다는 것이고, 일에 대한 태도가 언제나 성실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맛보는 진정한 기쁨은 일 속에 있다. 놀이나 취미의 세계에서 기쁨을 찾으면 일시적으로는 즐거울지 모르나 진정한 기쁨을 맛보기는 어렵다'. 주 40시간을 회사에 할애하여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므로, 이 태도를 익히면 일과 여가의 균형을 이루어 낼 수 있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에서는 그저 일을 사랑하라고 한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사랑하게 되면 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토록 고통받는 이유가 내 일을 사랑하지 않아서였을까 싶어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봤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미소를 띠고 열정적으로 임하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사랑하면 했지, 증오하던 대상을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할 이유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나를 알고 싶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이해하고 싶다.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상황이 불편하며, 가장 감동받을 때가 언제인지까지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오며 만난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직업을 알게 되었다. 지금처럼 톱니바퀴마냥 기계적인 일이 아닌, 사랑하기에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졌다. 진취적이고 추진력이 뛰어나며, 내면이 단단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수 십만 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회사를 다닌 기간 중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 순간 멈췄던 시계가 다시 째깍거리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내가 그 사람이 된다면 어떤 삶이 펼쳐질까? 이 여정의 끝이 실패일지라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더 멀리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결국 최악의 결과여봤자 다른 일들보다 일반 사무직이 잘 맞다고 결론 내리는 자아발견일 뿐이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과 주 5일 40시간씩 회사에 붙잡혀 있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새로운 상황과 환경에 오랫동안 놓일 때 스스로도 놀랄만한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매너리즘에 빠진 프리랜서들이 여행이나 워케이션을 통해 장소를 바꿔 발상을 환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짬을 내어 떠나는 며칠 정도의 여행으로는 다른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는 생활 패턴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를 낯선 세상에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퇴사를 생각했지만 버티고 버틴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퇴사가 머릿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 때면 입사를 알렸을 때 부모님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이제 고생 끝이라고, 괜찮은 회사이니 남부럽지 않게 적당히 행복한 삶이 기다린다고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스스로 깨트린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회가 정한 노선을 벗어나 부모님께 실망스러운 딸이 된다는 두려움에 수백 번을 망설였다.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걸까? 누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가? 그럼에도 결국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그 두려움에 아직도 부모님께 알리지 못했다.


 좋은 구실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한 핑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글을 쓰며 사회에서 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다. 왜 퇴사를 했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이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퇴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또한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찾은 변명거리이지 않느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듬더듬 변명이라도 하며 이 년동안의 그 정신적 지옥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음에 감사하다. 비록 도망치듯 나왔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우울이 사라졌기에 내 선택을 후회하거나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기회조차 간절한 사람들이 한 트럭인데 MZ 답다며 혀를 차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당시의 나보다 훨씬 힘든 회사 생활을 버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위안을 얻으면 안 되듯이 나의 고통을 상대평가할 수도 없다. 그 누구도 내 삶의 한 편의 조각조차 살아보지 않았으니, 선택의 기로에서 오직 나만이 왈가왈부할 수 있다.


 언젠가 내가 남들보다 현저히 뒤떨어져 있다고 느낀다던가, 등등 어떠한 이유에서든 문득 지금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책할지 모른다. 그때가 온다면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자책을 멈추었으면 한다. 버티려고 힘껏 노력했고 다가온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는 긍정적인 면모만 바라보았으면 한다. 나의 이번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고, 완전히 끝이 났다. 이로써 너의 앞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아직 너에게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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