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겨울 여행기 with 필름 카메라
밤 사이 내 안에 끊임없이 파고들었던 파도는 내가 잠에서 깬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김없이 고집부리는 파도 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7시.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이 기상을 했다. 여행 오면 눈이 잘만 떠진다던데. 예상보다 개운하진 않았던 아침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커튼을 펼치고 창문 너머로 보였던 일렁이는 바다가 나를 가만가만 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동이 트기 전, 산 너머로 보였던 울긋불긋한 색감이 기억에 남는다. 마치 아침 해가 "나 여기 있지롱. 기다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시간을 보니 일출까지는 약 10분가량 남아 있었다. 나는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앞에 펼쳐진 풍경 한가운데 어느 정확하지 않은 지점에 내 두 눈을 던졌다.
1분, 2분, 시간이 흐르고
해가 올라올 듯 말 듯, 잠이 올 듯 말 듯.
어딘가 몽롱하고 동시에 개운한 기분(아마 파도의 소리 때문일 것이다)을 느끼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정말 반의 반쯤 눈이 감긴 채 해를 보았던 기억이다. 해는 미동도 없이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아.. 녹색 광선이 떠오른다, 여자 주인공의 황홀감으로 가득 찬 그 표정이.. 혹 그녀의 그 순간이 지금의 이 순간과 비슷했을까.. 생각해본다. (이때부터 나는 어떤 의식 속에서 굉장히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녹색 광선,, 여자의 표정,, 아,, 좋다!'
한 시간 뒤, 나는 잠에서 깼다. 아까보다 더욱 강한 햇빛이 내 몸 구석구석을 탐구하듯 방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정신이 한껏 맑아진 기분이다.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카페로 향했다. 밥 먹고 커피는 국룰! 양양에서 진짜 맘 껏 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할리스를 갔는데 사실상 여기는 낙산에서 '핫플'이었다. 좁은 낙산에서 몇 없는 카페 중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카페이기도 하고 바다 앞 바로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여행객들로 북적였던 카페가 참으로 정겨웠다. 사실 서울에서는 그러려니 했을 텐데 이 한적한 바다를 앞에 두고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자니 괜스레 반갑고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사진도 찍고, 사람들도 보고, 바다도 보았다.
조금 멍을 때린 뒤 산책할 겸 바깥으로 나왔다. 숙소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낙산 도립공원엘 가보기로 결정했다. 거리도 가깝고 가는 길도 해변가를 쭉 따라 걷는 코스여서 오전 산책으로 딱, 이다 싶었다.
도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어딘가 정직했다. 모난 길 없이 길도 완만했다. 그 주변으로는 정말 많은 숙박업소들이 즐비해있었다. 대부분은 운영을 중단한 폐건물이거나, 아니면 한 두 대에 차량들만 심심찮게 보이는 숙소들 뿐이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가 이 낙산이 영화 <강원도의 힘> 촬영지였다는 걸 알게 됐다. 갑자기 어딘가 홍상수의 스멜이 주변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오늘 저녁은 이 영화다!
산책을 하다 지나쳤던 곳. 여기도 폐건물이었다.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확인해보니 모 대학교 부속 교직원 건물이었다. 건물 내부에는 사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언제 어떤 사람들이 이곳을 사용했을까 괜히 궁금해졌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폐건물 입구 한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나를 보고 계속 야옹거렸다. 그리곤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사람이 그리웠나 싶기도 하고 배가 고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동안 고양이와 놀아주었다. 애교가 많았다. 그리고 잠시 뒤, 애교를 다 부렸는지 쿨하게 제 갈 길을 갔다. (^^)
아프지 말거라!
숙소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시간은 숙소 안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고 바로 영화 볼 준비를 했다.
강원도에서 보는 <강원도의 힘>. 홍상수 감독의 초창기 때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에 내가 갔던 장소들이 나왔는데 너무 웃겼다. 저물어가는 바다를 옆에 두고 칸쵸와 커피와 꿈틀꿈틀 홍상수의 유머를 즐겼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바닷가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이제는 어두워진 바다를 보았다. 바다 내음이 추운 공기와 함께 코 안으로 삭 들어왔다. 등대의 빨간 불빛이 한 번, 두 번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거린다. 내일 아침엔 등대 쪽을 산책하기로 결정했다.
양양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내 안에 깃든 평온하고 느린 파도 소리를 계속해서 감각하고 싶은 그런 밤 말이다. 잠이 잘 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