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인간관계를 기하학의 도형처럼 명확하게 분류하고 싶어 한다. 점이면 점, 선이면 선, 혹은 완결된 원. 하지만 현실의 관계는 대개 이름 붙이기 곤란한 얼룩에 가깝다. 특히나 서로의 살결 아래 흐르는 뜨거운 파동을 이미 확인해 버린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우정이라는 단어는 이 관계를 담기엔 너무 건조하고, 연인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우리를 구속하기엔 너무 습하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목격했고, 언젠가 다시 그 뜨거운 궤도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서로의 눈동자 뒤편에 숨겨둔 상태다. 언제든 성냥만 그으면 타오를 수 있는 마른 장작더미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그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쪽을 택했다.
김영하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나'라는 자아가 타인에 의해 침범당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도시의 부족민들이다. 우리는 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내 삶의 일정 부분을 도려내어 상대에게 헌납해야 하는 일임을. 지금의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고독이라는 영토를 경작하느라 바쁘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채워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기묘한 결벽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우리에게 '친구'라는 명칭은 일종의 안전한 유보다.
우리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잃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정'이라는 가느다란 밧줄을 서로의 허리에 묶은 채, 각자의 심해로 잠수한다. 각자가 건져 올릴 진주가 무엇인지, 혹은 그 심해에서 마주할 괴물이 무엇인지 스스로 확인해야만 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절실하다.
누군가는 이를 비겁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행위, 감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 덮어두는 행위.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지적인 배려라고 믿는다. 섣부르게 관계의 완성(이를테면 결혼이나 구속력 있는 연애)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 것. 상대의 고독을 존중하기 위해 내 안의 욕망을 잠시 식혀두는 것. 그것은 파괴적인 열정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다정함이다.
우리는 아마 한동안 이 모호한 경계 위를 걸을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채, 가끔은 스치는 손끝에서 불꽃을 느끼고, 가끔은 서늘한 안부 인사 뒤에 숨겨진 깊은 그리움을 읽어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포옹이 아니라, 각자의 방에서 켜둔 스탠드 불빛이 서로의 창가에 닿고 있다는 안도감이다. 서로를 완전히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법을, 우리는 이 고요한 유예의 시간 속에서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선분이다. 하지만 때로는 닫힌 원보다 끝을 알 수 없는 선분이 더 자유롭다. 서로의 세계가 충분히 견고해지는 날, 이 선분들이 어떤 각도로 꺾여 만날지 혹은 평행하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으며, 그 고독의 항해 끝에 서로라는 항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임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의 우리는, 가장 가까운 타인이자 가장 먼 연인으로서,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아름답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